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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날편지188

2023.10.23 박노해 <가을볕>

by 박모니카

시월도 겨우 십여 일 남았는데 아직도 푸른 잎들이 무성한 가을. 그러나 때가 되면 미끄럼 타듯 한순간 떨어질 기온에 맞춰 나뭇잎들의 변신이 시작되겠지요. 달력의 숫자로만 보면 의아하지만 매일 일출 일몰의 시각이 만들어내는 부채꼴의 각도는 가을철, 그것도 늦 가을철 맞네요. 여느 해보다 물들어가는 은행 단풍의 속도가 다소 늦어지는 만큼 가을의 아름다움도 오래 남아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시간 역시 늘어날것 같아요. 오늘은 말랭이 마을 동네글방 수업날. 어제 예고없이 시낭송 준비 중간과정 확인한다고, 공방에 들어섰지요. 맘 속으로는 이분들이 준비를 하고 있을지, 안 하고 있다면 어떻게 꼬실까... 하며 단감 몇 개 들고 갔어요. 마침 드시고 싶었던지, 바로 단감을 깎으시더군요. 그러더니 주섬 주섬 주머니에서 각자가 맡은 시 쪽지를 꺼내셨어요.

“헌다고 허는데, 머리팍이 굳어서 안 외워져.”

“나는 안할거여. 아니 못할거여. 혓바닥이 안 돌아가는디 어떻게 혀.”

“작가님 나는 안혀도 되지?, 아니 종이보고 말만 해도 되는가?”

“난 쪼까 연습은 했는디, 한번 해보까? 한 줄이 아직도 자꾸 까먹긴 혀.”


한마디씩 하시며, 제 정신을 쏙 빼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들 연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지요. 기특한 학생들이라고 칭찬을 하늘 높이 해드렸답니다. 저는 떡도 맟추고, 상품이랑 낭송음악도 다 준비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잘 하셔야 된다고 다시한번 큰 못을 쾅쾅 박았습니다.^^ 그런데요, 문을 나서는 순간 어머님 한 분(80세)이 쪽지 하나를 주시는 거예요. 당신께서 ’사랑‘에 대한 시를 쓰셨다고요.


- 사랑이란 것은 / 누군가 의해 / 결국 스스로 / 그리움 속으로 / 길들여지는 것 // 사랑이란 것은 / 누군가 의해 / 결국 스스로 / 외로움 속으로 / 익숙해지는 것 // 사랑이란 것은 / 누군가 의해 / 결국 스스로 / 기다림 속으로 / 잊혀져 가는 것 –


이렇게 쓰셨습니다. 너무 놀라서 안아드렸네요. 시화전시회에 이 글을 넣어드리겠다고 약속하구요. 당신께서도 이 가을, 당신의 마음을 한번 써보세요. 참 고요와 참 행복이 저절로 와 있을거예요. 오늘은 박노해 시인의 <가을볕>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가을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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