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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날편지206

2023.11.17 유강희 <어머니 발톱을 깎으며>

by 박모니카

겨울 나무숲속에 고요히 쌓이는 흰 눈... 오늘의 음악배경이 실제인가 싶어, 이내 창밖을 바라봅니다. 간밤 내린 비로 기온이 뚝 떨어져, 오늘 낼 첫 눈이 예보되어 있군요. 어제 수능을 마친 학생들의 해방감을 생각하면 함박눈이 펄펄 내려 ‘난이도 갑’이었다는 수능 언어영역을 풀어헤치고, 그들을 겨울시인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최선의 결과로서 또 다른 멋진 시작을 꿈꾸는 시간이길 기도합니다. 어느 시인이 이런 말을 했지요. - 삶이 자꾸 시를 속이려 들거나 혹은 시가 삶을 속이려 들 때마다 나는 우두커니 먼 데를 바라본다. 먼 데가 와서 나를 태우고 끝없이 날갯짓하여 부디 날 서럽지 않게 어디론가 더 멀리 데려가주기를. 그 먼 데는 그렇다면 새이어야겠다. 먼 데가 먼 데와 하나로 딱 붙어 사랑의 지극한 말씀이어야겠다. - 유강희 시인의 말입니다. 오늘은 작가초청으로 이 분을 모십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에서 몇 번, 말씀을 나눈 적이 있는데요, 참으로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셨지요. 무엇보다 일상에서 흔히보는 가벼운 소재를 짧은 몇 줄 안에 보여주는 <손바닥 동시>는 저절로 '아, 그렇구나!'라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킵니다. 고3때, 최연소 등단, 신춘문예에 <어머니의 겨울> 당선으로 장학금을 받아 효도했다는 기사평도 있네요^^. 시집으로 <불태운 시집> <오리막>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동시집으로 <손바닥동시> <달팽이가 느린 이유> 등 6권, 지난달엔 고령의 어머님 말씀을 들려준 산문집 <옥님아 옥님아>출간...붙타는 금요일이라지요.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뜨겁게 안아줄 유강희 시인의 특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군산 예스트서점, 저녁 7시. 혹시나 그 시간에 첫눈이 예쁘게 내린다면, 겨울 어느날, 모니카의 커피쿠폰이 배달될거예요~~. 오늘은 유강희 시인의 <어머니 발톱을 깎으며>외 동시 몇 편을 들려드립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어머니 발톱을 깎으며 – 유강희


햇빛도 뼛속까지 환한 봄날

마루에 앉아 어머니 발톱을 깎는다


아기처럼 좋아서

나에게 온전히 발을 맡기고 있는

이 낯선 짐승을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싸전다리 남부시장에서

천 원 주고 산 아이들 로봇 신발

구멍 난 그걸 아직도 신고 다니는

알처럼 쪼그라든 어머니의 작은 발


그러나

짜개지고, 터지고, 뭉툭해지고, 굽은

발톱들이 너무도 가볍게

툭, 툭, 튀어 멀리 날아갈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저 왱왱거리는 발톱으로

한평생 새끼들 입에 물어 날랐을

그 뜨건 밥알들 생각하면

그걸 철없이 받아 삼킨 날들 생각하면



누에와 토끼와 송아지 - 유강희

산비탈 뽕나무 옆엔

사각사각 누에바람 살고

언덕 밑 씀바귀 옆엔

오물오물 토끼바람 살고

들판 마른 볏짚 옆엔

으적으적 송아버지바람 살고



민들레 - 유강희

누가 길가에

줄줄이 막대 사탕

꽂아 놓았나

어린 봄바람

동무들 데려와

사이좋게

핥아 먹고 가고

핥아 먹고 가고

어? 한순간

막대만 달랑 남았다


석류 - 유강희


햇볕, 한 마리 두 마리

할머니네 빈 마동에

들락날락하더니

어느새 석류 껍질 속,

한 움큼 알을 슬어 놓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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