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봄날편지230

2023.12.5 도종환 <새벽을 기다리며>

by 박모니카

핸드폰 일정표에 써있던 메모들이 갑자기 사라진 날. 1년 내내 오색현란한 색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무슨 일들을 그리도 많이 써 놓았는지, 빼곡했는데... 갑자기 흰 바탕이 가득했어요. 동시에 제 머리도 하얘졌지요. 완전한 방전 신호를 일부러 알려주는 것 같았어요. 이제 좀 쉬라고요. 그런데 쉬는 쪽에 마음이 기울긴 커녕, 하루종일 불안한 마음을 움켜잡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흔들거리니 보이는 글자들까지도 자꾸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요. 어디론가 완벽히 고요한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혹시나 선약한 것을 실수할까 봐 몇몇 지인들에게 무슨 행사나 약속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다시 일정표에 기록하며 어제를 보냈네요. 옛말에 ’이무위용(以無爲用)’이라, 모든 사물은 비어있어야 가치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제가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가 봅니다. 그릇은 건재하되 담길 내용에는 빈 공간을 두는 일,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기억을 잊는다는 것, 참으로 두려운 일... 그런 날이 언젠가 올 수 있겠지요. 잊을 것이 두려워 다른 곳에 메모를 해 놓아도 그 사실마저도 잊는 날이 올 수 있겠지요. 어느 날 세상일을 차츰 차츰 잊는 시간이 다가온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들만은 오래토록 기억할 수 있는 공간하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도종환시인의 <새벽을 기다리며>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새벽을 기다리며 – 도종환

검푸른 하늘 위로 싸아하게 별들이 빛나고

온 들을 서리가 하얗게 덮는 동안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밤새도록 서리에 덮인 들길을 걸어

고개 하나를 또 넘어야 한다.

가시숲 헤치고 잡목수풀 지나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아직 길이 끝나지 않은 저 숲에는 녹슨 철망도 있다 하고

발을 붙드는 시린 계곡물과 천길 벼랑도 있다 한다.

잠 못 드는 이 밤 산짐승 울음소리가 가까이에 들리고

어쩌면 겨울이 길어

바람 또한 질기게 살을 때리며 뒤를 따라오기도 할 것이다.

눈물로 가야 할 고난의 새벽이 가까워오는 동안

이 길의 첫발을 우리로 택하여 걷게 하신 뜻을 생각했다.

나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함께 떠나기로 한 벗들을 생각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첫새벽을 택해 묵묵히 이 길을 떠났는지

어찌하여 우리의 싸움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우리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발자국들이 길이 되어

이 땅에 문신처럼 새겨진 뒷날에는 꼭 기억케 될 것임을 생각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시봄날편지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