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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날편지231

2023.12.6 허수경 <농담 한송이>외 1편

by 박모니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 시 한 줄에서 시인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시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는 소위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지요. 저야말로 ‘시‘라고 말하는 장르의 글을 쓰지 않습니다. 짧은 글 속에 넣고 싶은 말과 마음이 많은 사람은 늘 헤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시를 보면서 마음에 와닿는 ’좋은 한 줄‘을 찾아내는 일에 열심이지요.^^ 누군가의 시를 읽을 때 전체가 다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어느 한 줄이 좋아서 아침편지로 선택하는데요, 시의 한 줄을 보는 능력, 이도 역시 참 어려운 일이더군요. ’그냥 좋아’로 대답하는데 익숙한 우리들이니까요. 어제 글쓰기 반의 과제로 올라온 ‘비판적 사고로 시 엿보기’. 각자가 선택한 시를 자세히 보고 다양한 각도에서 질문하기를 통해서 시를 만난 시간이 있었네요. 혹자들은 말하지요. 그냥 읽어보라고. 기준을 없애라고요. 물론 그럴 때도 있어야지요. 하지만 또 다른 때도 있어야 글을 쓰는 자신의 다른 모습도 발견하지요. 과제를 낸 문우들의 능력은 제 기대치를 넘어선 분들이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니’ 그 시들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을까요. 만약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를 읽고 이렇게 공감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넙죽 절이라도 해야될 것 같았어요. 시 한 편의 바다에 한 줄의 파도가 만들어내는 생명의 소리. 제가 가장 먼저 귀 기울여 듣고 받아쓰고 싶습니다. 어제 수업에서 대표된 허수경시인 시 두 편, <농담 한송이> <네 말 속>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농담 한송이 – 허수경(1964-2018, 경남 진주)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네 말 속 - 허수경


네 말 속에 배반이 있었다

네 말 속에 집이 곰팡이가 기어오르는 벽이

그 벽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네 말 속에 방이 있었다

방 속에는 대포가 총이 있었다

만년설을 지나가던 하늘이

총구 속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면도칼을 들어 네 말을 잘근잘근 자르는

네 말도 있었다

네 말 속에 네 말 속에

현관에서 울고 있는 내 목도리가 있었다

네 말은 내 신발 속에서 잘려가며 젖는다

네 말 속에는 박히지 못하는 못이 철넝쿨이 되어

내 입을 점령하고 있었다

안준철시인 사진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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