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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날편지232

2023.12.7 박노해 <등 뒤를 돌아보자>

by 박모니카

책방에 오면 시와 그림이 그려진 시화엽서, 시화캔버스가 있지요. 시(詩)전령사도 아닌 제가 좁디좁은 책방의 아이콘으로 ‘시(詩)’를 선택한 건 참 잘한 일인 것 같아요. 골목잔치때마다 방문객들에게 시 한 줄 써보라고 권한 일도 잘했구요. 책방과 시를 선택하여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글쓰는 작가들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요. 또 다른 행운은 제가 어린이들에게 동시를 읽어주고, ‘시란 무엇인가?‘의 세상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는 일이랍니다. 어제는 모 초등학교의 특별활동으로 200여명의 학생들에게 동시화캔버스 만들기체험을 지도한 첫날이었습니다. 요즘 초등 교실의 문화를 모른체, 학생들을 만났는데요, 학생들 책상위에는 책이 없고 노트북이 있더군요. 나중에 들으니 전자책도입 이전 시범적으로 실행하는 시스템이라고 하더군요. 종이책 한 권이 없는 교실문화! 이 문화안에서 종이책을 들고 동시를 낭송하는 제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동시의 제목 유추하기, 동시의 일부 단어를 바꿔보기, 학교명으로 삼행시 짓기, 손바닥 위에 동시쓰기, 도화지에 자작시화그리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지도했죠. 내심 초등학생들만의 순수한 아이디어를 기대했는데요, 소수 일지라도 정말 시적 감수성과 은유와 직유법 등 시적 기법을 보여준 학생들도 있어서 흐뭇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든, 학생들과 함께 있는 현장은 늘 생동거립니다. 요즘 제 마음에 빨간 방전코드가 켜져있는 상태였는데, 어린학생들로 인해 희미한 초록불이 깜박거렸네요. 완전 충전을 위해 당분간 책방 일보다는 학원이든 학교든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에 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박노해시인의 <등 뒤를 돌아보자>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등 뒤를 돌아보자 - 박노해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우리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두고 온 것들을 돌아보기 위한 것

내 그립고 눈물 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몸을 밀어주며

등불 같은 첫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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