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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ul 29. 2023

버티는 인생에서 가벼운 인생으로

'버티는 인생'을 끝내고 알게 된 것


은퇴 후 반년이 다가온다. 쉴 틈 없이 앞만 보면서 30여 년 출퇴근 인생을 달려왔다. 오래 나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돌아보니 어쩌면 '버티는 인생'이 따로 없었다. 여전히 목과 어깨는 뻐근하다. 무의식적인 긴장상태가 습관화된 걸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


퇴직한 후 옷장을 들여다보고서야 새삼 나의 상태를 실감했다. 외출을 하려고 보니 입을 만한 옷이 마땅치 않다. 온통 어둡고 칙칙한 색깔의 옷뿐이다. 검정이나 감청색 계열이 대부분인 양복이야 말할 것도 없고 주말 평상복도 무채색이 대부분이다.


우리 세대 보통의 직장인들이 이런 모습일까, 아니면 나만 유독 심한 걸까. 옷장에 가득한 옷을 두고서도 철이 바뀔 때 여자들이 '입을 만한 옷이 없다'라고 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사람은 그 처지가 돼봐야 안다. 입는 옷에 그 사람의 성향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나란 인간이 이렇게 특색이 없는 걸까. 굳이 튀는 걸 경계하듯이 중간쯤에 서서 진지한 척, 무겁게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집안 DNA를 살펴보니


가끔 집안 내력이 그런 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실 가족 중에 성격이 화끈한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뜨뜻미지근하다고 해야 할까. 절대다수가 MBTI의 'I형'이다. 미덕이라면 사고 치는 일도 거의 없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은 다하는 것. 우리 3남매 단톡방에선 그나마 내가 톡을 많이 날리는 것 같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천직이던 교사답게 평생 성실과 책임감의 대명사였던 분. 6남매 중 'K장남'으로서 집안의 무거운 짐을 진 채 두메산골에서 광역시까지 힘겹게 가족을 이끌었다. 그렇게 인생의 좁은 길을 팍팍하게 헤치며 살다 가셨다. 아버지 성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이 들면서 갈수록 닮아가는 나에게 놀라게 된다.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서 노모와 대화할 기회가 많아졌다.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신 조부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친화력이 대단해 누구와도 잘 어울리셨고, 동네 여기저기 왕래하시며 밥이나 술을 얻어먹는 일이 예사였다고 한다.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활달한 성격에 한량 기질이 농후했다니, 우리 집안에 그런 'E형'이 활약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아버지는 무거운 인생의 표본 같은 분이셨지만, 자식들에게 재미난 별명을 붙여 놀리듯 부르고 종종 유머를 날리곤 하셨는데, 어쩌면 그게 조부의 DNA였을까.


두메산골 고향 집의 겨울 풍경 (여름에는 겨울이 그리워진다)



가벼운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


가벼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겠다. 다행히 E형의 조상 DNA가 있으니 잘 살려보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 가벼운 인생의 시작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아닐까. 요즘 도서관대학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클래식과 미식인문학, 드로잉과 스케치를 배우느라 '메뚜기 한철'처럼 바쁘다. 날마다 배우는 중이지만 학생이라기보다는 놀이 같다.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매 순간이 즐겁고 신난다.


다음으로는 지금 해보지 않은 것,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일이다. 은퇴 직후에 시작한 필라테스는 여섯 달째에 접어든다. 처음엔 정신없이 쫓아가기 바빴는데, 이제는 동작의 방향이나 강약 조절에 조금씩 감이 생겼다. 처음엔 "할만하세요?"라고 걱정하던 강사가 엊그제는 "근력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라고 얘기해서 뿌듯하다. 정원 16명에 유일한 남자 1(60대)이 낙오되지 않고 근근이 따라온 보람이 느껴진다.


요즘 한창 재미를 붙인 건 '조조 영화' 보기다. 최근에 연달아 <미션 임파서블 7>, <밀수> 2편을 봤다. 현직자들이야 시간이 없어 엄두를 못 내겠지만, 평일 조조 영화 보기는 백수 프리미엄 중 최고가 아닐까. 사람 없이 널널한 영화관에서 느긋하게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 여름엔 북극 냉방까지 가동하니 가성비 좋은 피서론 금상첨화다. 더위에 입맛이 뚝 떨어진 아내는 극장에만 들어가면 팝콘 킬러로 돌변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환대의 리액션을


가볍게 살기 위해선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수다. 은퇴 후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옥석이 구분되는데, 계속 맺어갈 관계라면 먼저 환대를 보내는 게 좋다. 자주 만나기 어려운 시절이라 SNS도 아주 중요하다. 단톡방에서 '성의 있는 리액션'은 속마음을 표현하고 정과 의리를 나누는 데 빠질 수 없다.


요즘 내게 가장 활발한 단톡방이라면 50~60대로 구성된 8인조 모임이다. 일로 만나 2004년부터 정기 모임을 이어오면서 평생 친구처럼 지낸다. 단톡방은 수시로 불이 붙는다. 근황이 올라오고 재미난 소식이 전해지면 댓글은 순식간에 길게 이어진다. 검색의 고수, 센스의 달인들이 있어 '이모티콘 배틀'이 벌어지기도 한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훈훈한 정이 싹트고, 모두 즐겁고 유쾌해지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함께 '가벼운 인생'을 살아가는 멋진 동지들이다.


덕분입니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

 

50~60대들의 즐거운 이모티콘 놀이


 



* 대문사진은 제주 가파도의 풍경 (2022. 8월 8인조 모임 장소) ⓒ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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