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Oct 18. 2023

오늘 나는 무엇이 아름다운가

10월부터 시(詩) 강의를 듣는다.

시를 읽고 이해하는 데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이다.


오래전 학생 시절부터 시 읽는 걸 좋아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종종,

사무실에서 가까운 교보문고에 들러 시집을 뒤적였다.

데리고 온 시집을 사무실에서 틈틈이 읽는 게 즐거움이 됐다.


왜 시를 좋아했을까.

우선 시가 주는 여백의 느낌이 좋았다.

짧고 노래 같아 언제든 열어 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거기엔 잠시간의 휴식과 여유가 있다.

일하는 사이 지쳐가는 내게, 시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선물했다.

소설은 아무래도 진입 장벽(?)이 있지 않은가.

부피가 있으니 약간의 인내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  

   

수업 첫 시간에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시,

‘시인들의 시인’이라는 릴케가 쓴 시를 읽었다.  

윤동주도 큰 영향을 받은 탓인지,

대표 시 '별 헤는 밤'에 릴케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침 지금 계절에 딱 어울리는 시다.  

너무 알려진 시라 조금 식상하지만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본다.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막바지의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푸시어,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시고,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 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내일 날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특히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내일 날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마음이 왠지 스산해지는 듯한 구절,

방황하는 인간의 쓸쓸한 모습이 물씬 풍긴다.

근데 고독한 사람 부분은 역설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독이 계속되지만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면서

불안한 시간을 견디는 인내와 성장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않는다, 는 대목도 그럴까.

그 뜻이 무엇인지 질문한 내게 강사는 오히려 숙제를 냈다.

어떤 의미인지 화두처럼 생각하며 가을을 한번 지내보라고.




릴케의 '가을' 시를 모티브로 한 전시가 있다고 한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거장인 안젤름 키퍼가 지난해 서울에 이어 현재 대전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헤레디움, 2023.9.8~2024.1.31)


1945년생 안젤름 키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낳은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며 논쟁적인 화가로 꼽힌다.

독일의 정체성과 역사, 문화와 신화 등 금기시되거나 묵직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뤄왔다.

가을 전시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생성과 소멸, 파괴와 재탄생을 강렬한 은유로 표현한다.  

재, 점토, 납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구체성과 추상을 넘나들며,

이미지와 물질, 텍스트가 어우러지는 독특한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릴케의 시는 60년 간 내 기억 속에 존재해 왔다.
... 나는 이미지(picture)로 사고하는데, 시는 이를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시는 마치 바다의 부표와 같고, 나는 부표들을 오가며 헤엄한다. 그들이 없으면 길을 잃는다...
- 안젤름 키퍼의 인터뷰 중에서


강렬한 색감으로 가득 찬 키퍼의 작품은 감탄과 쓸쓸함, 화려함과 폐허를 동시에 자아낸다. 시와 그림이 하나의 세계로 만난다.




길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완연하다.

그토록 뜨겁고 날카로운 햇빛이 조금씩 누그러진 게 느껴진다.

남쪽으로난 아파트 거실 창가에서 아침을 먹는데

어느샌가 해가 길게 드리우며 방안으로 조금씩 들어온다.

밤엔 제법 묵직한 이불을 덮어야 환절기를 잘 날 수 있다.   

  

참, 좋은 계절이다.

자연의 순환, 계절의 변화가 절로 고마워진다.

내 청춘이 머물던 광화문 거리에도 이제 노란 낙엽이 뒹굴겠지.

시를 읽던 어느 젊은 날이 떠오른다.

은퇴를 하고서야 시를 가까이했던 시절의 여유가 조금씩 되살아오는 것 같다.

잠시 마음을 담아 끄적끄적 글을 적어본다.    


      

오늘 나는 무엇이 아름다운가     


가을이다.

거실 창가를 건너온 해가

긴 그림자를 안으로 드리우기 시작한다.

아침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시 한 편을 읽는다.

시인의 마음을 그려본다.

문득

눈앞에 펼쳐진 다른 세상을 만난다.     


오늘

또 하루의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서대문 독립공원의 어느 가을날 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버티는 인생에서 가벼운 인생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