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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Dec 28. 2023

한겨울에 동남아 말고 홋카이도 가는 이유

극한 추위에 홋카이도가 웬 말이냐     


대한민국에 최강한파가 휘몰아치던 2023년 12월 말이었다.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5도, 체감온도는 영하 21도에 이르는 극한의 강추위에 폭설까지 겹쳤다. 그런 날,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위도가 비슷한 일본의 최북단 섬인 홋카이도로 떠났다. 따뜻한 남쪽 나라, 다낭이나 발리 같은 동남아 여행이 인기인 겨울철인데도 말이다.      



패키지여행을 시작하고 보니     


여행사의 패키지여행에는 전국에서 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3~4인 가족, 엄마와 딸, 50대 여성 3인조 등 구성이 다양했다. 거기에 50~60대 8인조 아재들이 끼었다. 우리는 20년을 함께한 친구들,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1년에 4번씩 정모를 갖는다.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을 나섰는데 어쩌다 추운 나라를 찾게 됐다.     

 

일본은 요즘 한국인의 해외여행지로 인기 절정이다. 가깝고 안전하고 입맛도 비슷한 데다, 엔저 현상으로 가성비가 최강이기 때문이다. 현지 여행지 곳곳마다 한국 여행사의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서는 게 금방 눈에 띈다. 손쉽게 한국어 안내도 들을 수 있다.      

  

3박 4일 짧은 일정이지만 홋카이도의 주요 도시와 관광 명소를 빠르게 둘러본다. 패키지여행의 최대 장점이다. 눈의 언덕과 칼데라 호수, 흰 수염 폭포, 겨울 빛축제 공원과 운하, 핫플 거리 등등. 온천욕과 스노 래프팅, 특산물과 면세점 쇼핑에 다양한 주류와 미식 체험도 곁들여진다. 여기저기 이동하느라 하루가 빠듯하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그리 춥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눈보라와 바람도 잦았지만, 한국의 맹추위에 비할 바 아니었다.    

 

시로가네온천에 위치한 흰수염폭포. 겨울에도 얼지 않고 에메랄드빛 물줄기가 흐른다.



홋카이도 여행의 백미     


단연 '눈멍'이다. 지역마다 날씨는 변화무쌍했지만 가는 곳마다 설경이 펼쳐졌다.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이동하면서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눈 세상을 만났다. 홋카이도 제2의 도시인 아사히카와에서 오타루로 이동하던 시간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입을 모았다. 버스 안에서 느긋하게 창밖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눈멍하던 순간의 느낌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눈이 주는 감성은 정말 놀랍도록 특별하기만 하다. 하얗게 덮인 들판과 산, 집들을 보고 있으면 홀연 나를 잊고 다른 세상과 만난다. 문득 아련한 과거 어느 기억 속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동화 같은 꿈과 상상의 세계로 날아가기도 한다. 순백의 바탕화면 속으로 조금씩 작아지면서 사라지는 느낌, 어떤 ‘영원성’ 같은 걸 경험하는 순간이다.     



눈 천국, 감성 천국

 

둘째 날 찾은 오타루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1995년 영화 <러브레터> 촬영지로 유명하다. 잊을 만하면 재개봉하는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일본영화. 설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영상미와 스토리, 애틋한 감성이 일본 소도시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수많은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눈 덮인 거리와 집, 오르골과 유리공예, 디저트를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샵들이 참 따뜻하고 정겹다.  


설경하면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 (1968)이 떠오른다. 좀 오래됐지만 제목만이라도 기억할 만하다. 설경이라는 작품의 배경을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필체로 묘사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소설의 첫 문장은 일본문학 도입부의 정수로 불리며 자주 인용된다고 한다. 간결한 공간묘사로 여유롭고 푸근한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아재들이 1등으로 모이는 이유     


패키지여행은 추억의 ‘수학여행’ 같다. 이동이 많고 관광지에 가면 내렸다 탔다를 반복해야 해서 귀찮기도 하다. 근데 아재들의 액션은 꽤 심플하고 절도가 있어 흥미로웠다. 모임 시간도 칼같이 지키고, 버스에 1착으로 컴백하는 팀은 거의 우리였기 때문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게 몸에 밴 탓일까. 혹시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설렘이나 호기심이 그만큼 줄었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나이를 먹다 보니 뭔가 새로운 걸 구경할 때도 선호나 취향 결정이 빠른 편이다. 인생의 경험 때문일까. 흥미롭지 않은 곳에선 금방 발걸음을 돌린다. 가이드가 귀가 따갑게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쇼핑을 유도해도 관심이 없으면 건성으로 지나친다. 물론 필요할 땐 결정도, 지르는 것도 신속하다(우리들 용어론 '즉시 시행').



여행에서 중요한 것 


전성기엔 다들 2차, 3차를 마다하지 않는 주당과 애주가들이었으나 세월 따라 이제는 주류, 비주류로 반반씩 나뉜다. 주류파도 시들해진 걸까, 아니면 비주류파의 비협조(?) 때문일까. 야심한 밤에 거리의 이자카야 탐방 대신 호텔 내에서 편의점 맥주로 만족하고 만다.


세월이 무심하다. 모험과 욕심은 줄고 내 몸과 취향 따라 맞춤형으로 가고 있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지보다 여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갈수록 고맙고 감사한 사람들이다. 인생 여행이란 게 이런 걸까.





내용이 길어져 다음 에 이어집니다.

- 일본여행의 깨알 재미


오타루 거리 풍경
오타루의 오르골 전시장 내부



#오타루 #러브레터 #설국 #패키지투어 #눈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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