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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Aug 06. 2024

아내에게 배우는 수다의 기술 3가지

어느새 일상으로 들어온 수다


은퇴한 후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내의 수다를 접하는 게 흔한 일상이 됐다. 특히 식사 자리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대화의 주도자는 물론 아내. 내가 은퇴한 후론 명실상부 집안의 일인자로 부상했다.


아내의 말문이 트이는 날, 속으로 적이 고민이 된다. ‘드디어 보따리가 하나, 둘 풀리는구나’. 나는 종종 ‘경청’의 시험대에 오른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때로 건성으로 듣다 잠시 딴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대화를 놓칠세라 화들짝 놀라며 눈 앞의 현실로 컴백한다. 혹시라도 불경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가정 평화에 위협이 될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고 속으로 되새기면서...



남자가 수다 세상을 만나면


수다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은 걸 가리킨다. 흔히 여자들의 대화는 수다, 남자들의 대화는 잡담이라고도 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수다, 또는 말이 많다는 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입이 싸고(?) 가볍거나 처신과 행동이 진중하지 못해 믿을 수 없는 자’로 보기도 한다. 남자들은 약속이 있어도 맨 정신 상태면 대개 한두 시간에 자리가 파한다. 술이라도 곁들여야 분위기를 타고 달리게 된다.


여자들은 차 한잔 앞에 두고도 몇 시간을 훌쩍 보내는 게 보통이다. 아내를 보면서 느끼는 일이다. 여동생도 비슷하다. 지방 도시에 계신 노모와 통화하면서 난 10분 정도면 제법 대화가 길었다고 생각하는데, 여동생은 보통 1시간이 기본이라고 해서 놀랐다. 여자들 수다의 특징은 무엇일까. 가랑비에 젖듯이 나도 어느덧 하나씩 배우면서 수다의 세계를 조금씩 맛보고 있다.



1. 디테일에 강하고 샛길을 즐긴다


아내는 작은 것에 강하다. 소소한 일이나 어떤 장면의 자잘한 순간까지 어쩌면 그렇게 기억이 생생한지 놀랄 때가 많다. 글을 쓸 때도 구체적인 상황의 묘사와 서술이 뛰어난 편이다. 이야기꾼이나 소설가적인 기질이 있다는 걸 자주 느낀다.


여자들의 수다는 가지를 치고 샛길에 들어서며 끊임없이 이어진다. 일정한 주제나 결론이 없고, 딱히 정해둔 시간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서너 시간 훌쩍 흐르는 건 예사. 그 자리, 그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건 수다의 찐 매력이 아닐까 싶다. 알고 보면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에 유용한 실천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이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간단명료한 걸 선호하는 편이다. 글도 그렇고 대화도 그렇다. 하지만 수다 세상에 점점 친숙해지면서 나의 수다 실력도 조금씩 늘어가는 것 같다. 글쓰기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대화체나 에피소드 같은 사람 사는 모습이 들어가고 있다.



2. 공감과 리액션으로 리듬을 탄다


수다에는 리듬이 필요하다. 말하는 사람은 달리고 상대는 경청하면서 ‘서로 주고받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언어감수성 수업(2024)>의 신지영 교수는 보통 우리가 대화할 때 서로 티카타카가 오가는 게 불과 6.8초 만이라고 한다. 그만큼 끼어들기가 심하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적절한 흐름과 주고받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게 좋다고 강조한다.


판소리처럼 한 사람이 ‘썰’을 풀 때 추임새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맞장구와 리액션은 관심을 표하고 공감을 나누는 데 절대적이다. 모든 대화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여자들은 이런 데 능한 것 같다. 이야기 도중에 필을 받으면 아내는 흥이 넘치고 텐션이 격하게 올라간다. 그 순간, 바라보는 나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며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어진다.


남자들은 대체로 일상의 감정 표현에 미지근하다. 단톡방의 리액션도 인색한 편이다. 직접 만나 얘기하면 화통해질까. 술이나 한잔 거하게 걸치면 곧잘 형님 동생이 되면서 의리를 찾지만, 정작 평소에는 데면데면하다. 다행스럽게 은퇴 후론 나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대낮에 절친들을 만나도 밥 먹고 차 한잔하면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술 없이 달리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3. 끼리끼리 수다 친구를 잘 사귄다


아내는 TV를 보지 않는다. 어느 날 모임에서 예전 직장동료들을 만나고 와서는 한숨을 길게 쉰다. 상대 두 사람이 ‘환승연애’의 광수, 옥순이 얘기만 해대서 아주 따분했다는 것이다. 관계를 이어가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최고의 수다 조건은 좋은 수다 친구와 만나는 일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사실 고난도의 기술. 브런치스토리에는 가끔 글쓰기를 통해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데, 모두 여자들이고 남자는 본 적이 없다. 아내도 글 친구를 서너 명 사귀었는데, 종종 만나 차담을 나눈다. 글에서 드러난 내밀한 감정을 통해 신뢰감이 쌓이다 보니 그 관계의 깊이는 오랜 친구 이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친구를 사귀고 관계가 깊어지는 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공통의 대화 주제. 상대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면 여행 대신 상대의 관심사인 딸 문제, 자녀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식이다. 서로 마음과 결이 통해야 하는 경지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공감의 기술을 구사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든다.


새 친구 사귀기란 남자들에겐 거의 ‘넘사벽’ 경지에 가깝다. 반 포기 상태에 빠진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이미 알고 있던 지인 중에 그간 연락이 뜸했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아서 매달 만나거나 두어 달 즈음에 만나는 친구들이 대여섯 명으로 늘었다. 만날수록 대화의 주제와 내용에도 공통의 화제가 많아진다.


   

최고의 행복에 필요한 수다의 기술


알고 보면 모든 인간관계는 수다와 잡담에서 시작한다. 진지하고 의미 있는 대화가 아니다. 이 순간을 즐겁게 만드는 건 재미와 흥미 아닌가. 그만큼 사회 활동에서 사람들 사이의 연결과 윤활유 역할도 한다. 가볍게 시작해 그 자리의 분위기나 사람 사이의 교류에 뜻밖의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굿라이프>(2018)에서 최인철 교수는 “행복에 관한 연구들은 ‘경험을 나누는 수다’가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경험’을 나누는 수다가 중요하다고 한다. 다만 비교를 유발해서 서로 불편해지는 ‘소유’에 관한 대화는 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경험에 관한 대화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다양한 삶과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수다와 대화는 우리 일상과 삶의 중요한 활력소다. 행복은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앞의 소소한 순간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하는 사람, 무심코 만들어가는 모든 순간들이 참 소중하다. 은퇴를 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만나며 배운다. 가까이 있어도 모르는 세상이 많다. 아내에게 배우는 수다의 기술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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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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