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광화문의 예술영화관 씨네큐브를 찾았다. 단톡방에서 ‘중년들이 보면 좋은 영화’라고 추천해서 즉시 예약. 마침 조조 타임이라 아내와 둘이 가도 1만 4천 원, 가성비 최고다. 에어컨 빵빵한 극장에서 마실 생각으로 따뜻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기분 좋게 입장하려는 순간이었다.
생수 외 모든 음료수 반입 불가라며 제지한다. 순간, 당혹감과 황당함이 분출한다. 세상에 요즘 도서관 안에서도 커피 마시는데 영화관이 안 된다고? 난감한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입장하니, 예고편 없이 바로 본영화를 시작한다. 그건 맘에 든다. 진짜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스럽지 않은 영화가 주는 현실적인 감동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일본 도쿄 시부야구의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도 사고도 없던 어느 날, 사이가 소원했던 조카가 찾아오면서 작은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 또한 영화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 않다. 시종 차분한 관찰자 시선에, 크게 흥미를 끌 만한 극적인 서사도 없다. 눈에 띄는 우정이나 러브라인, 중년의 판타지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영화는 놀라운 충만감과 깊은 여운을 준다. 자칫 밋밋하고 지루할 뻔한 내용에 음악 애호가인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과 일본의 국민배우로 꼽히는 야쿠쇼 코지가 만나면서 특별한 영화가 됐다. 삶의 의미를 담담하게 관조하듯 그려낸 작품으로 꼽히며,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가 끝나도 이어지는 일상의 위로
영화를 본 지 일주일이 지나가는데 여전히 영화 가운데에 있는 것 같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몽글몽글한 기분이 나를 기분 좋게 사로잡는다. 좋은 영화는 영화를 넘어서는 어떤 말할 수 없는 만족감과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지금 흔들리고 있거나, 일상이 왠지 불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적합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유난히 무더위가 긴 2024년 여름, 만사 귀차니즘에 빠진 중장년 동년배에게도 권하고 싶은 영화다. 머릿속을 계속 맴돌며 가슴속에 오래 머무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봤다. 영화에서 배우는 소소한 일상의 힘과 위로, 그 정체는 무엇일까.
1. (일상) 나만의 리추얼에 충실하기
히라야마의 일상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화초 가꾸기, 출근길 운전하며 올드팝송 듣기, 본업인 화장실 청소, 점심시간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 헌책방 방문과 책 읽기, 하루를 마감하며 목욕과 가벼운 술 한잔.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이지만, 그에겐 의미와 격식이 있는 리추얼 같다. 매 순간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저 눈앞의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다는 게 뭔지를 보여준다.
일상의 소중함은 바로 삶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판에 박힌 루틴이어도 똑같진 않다. 우주에 완전히 같은 건 없는 법, 조금씩 변화하는 날을 받아들이는 게 삶이다. 하루의 일상을 잘 견디면 우리 인생은 단단해진다. 히라야마는 늘 혼자지만 외로움이 끼어들 틈이 없다.
우리 각자에겐 어떤 일상과 리추얼이 있을까. 나의 하루를 생각하고 한 주를 그려본다. 아침 식탁에서 시 한 편을 읽고 진한 캡슐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은퇴 후엔 카공과 글쓰기, 도서관의 강의를 듣는 게 일상이 됐다. 일주일에 세 번 요가와 필라테스로 몸을 돌보는 시간도 소중하다. 리추얼처럼 더 몰입해서 할 만한 것이 없을까 고민 중이다.
2. (관계) 적절한 친절과 소통
히라야마는 과묵한 남자다. 거의 말이 없고 웬만해선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항상 보일 듯 말 듯 웃으면서, 눈을 맞추며 인사한다. 조카가 가출해 찾아왔을 때는 자기 방을 비워주고 창고방 구석에서 쪽잠을 잔다. 동료인 다카시가 곤경에 처할 때는 지갑에서 돈까지 꺼내준다. 인생에서 친절이 무엇인지를 그만의 방식으로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영화 자체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의 상처와 사연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절연하고 스스로 고립을 택한 정황이 보일 뿐이다.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세상과 소통하는 걸 멈추진 않는다. 그의 소통은 일본 특유의 아날로그 방식이 두드러져 흥미롭다. 한국이라면 고물상에서나 찾을 법한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 팝송은 뜻밖의 울림을 준다. 사람의 감촉과 음악의 물성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디지털 시대, 레트로 감성에 향수를 느끼는 관객이 위로를 받는 이유다.
현대인의 관계와 소통은 어떤가. 타인과의 적절한 관계 맺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온라인 소통은 어느 정도 활발하지만, 스치는 듯 가볍거나 일회성 수준에 머물러 있기 쉽다. 우리 인생에 진짜 힘과 위로가 되는 건 친밀한 사람과의 교류와 피부에 와닿는 온기다. ‘진실로 마음이 통하는 한 사람이면 족하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나만의 적절한 소통법이 필요하다.
3. (삶) 각자 빛나는 인생과 완벽한 세상
히라야마는 평소 공원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일본에서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코모레비’는 어느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아름다움, 인생과 세상의 소중한 순간을 말한다. 잠깐 머물다 지나가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흥을 주기 때문이다.
암 선고를 받은 또래 남자와의 ‘그림자밟기’ 장면도 인상 깊게 남는다. 그림자가 겹치면 두 배로 어두워질까,라는 질문을 하며, 두 남자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놀이하는 장면은 노년 인생의 동지애와 애틋함을 자아낸다. 세상의 수많은 그림자처럼 코모레비도 비슷하지 않을까. 순간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나뭇잎들은 지금 우리에겐 더없이 아름다운 장면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 빛나는 인생이다. 수많은 인생이 개별적으로 빛나면, 이 우주는 완벽한 세상이 된다. 오늘 그 하루는 서로 모이고 겹쳐서 완벽한 날들이 된다. 그런 날들은 또한 한 사람의 긴 인생을 이룰 것이다. 영화 제목이 ‘퍼펙트 데이즈’인 이유가 아닐까. 우리 모두에겐 그런 퍼펙트 데이가 있는 것이다.
여운과 여백이 남는 영화
인생은 흘러간다. 타인에게 나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모두 이해받고 박수를 받지 못해도 우리는 스스로 빛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을 잘 살면 된다. 남과 비교하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다. 어제보다 한 발자국만 나아가면 충분하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삶의 희로애락을 압축해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왜 야쿠쇼 코지가 대배우인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며 감탄을 자아낸다. 니나 시몬의 노래 ‘feeling good’이 흐르며 웃는 듯 우는 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온갖 감정의 극치를 표현하는 그의 표정은 관객의 넋을 잃게 만든다.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는 장면이다.
우리의 일상과 삶도 그렇게, 희로애락의 모든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지금 우리 눈앞의 이 순간이 소중한 이유다. 내 인생을 만드는 오늘, 이 하루도 감사한 마음으로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