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체성과 표현 욕구가 유난한 한국인 들여다보기
지나온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갈 수만 있다면, 문득 돌아가고 싶은 추억 속의 한 장면을 골라보자. 30대 후반 혼자서 떠난 스코틀랜드 여행이 떠오른다. 황량한 산과 계곡이 끝없이 이어지던 길, 차도 사람도 드문 척박한 자연의 한가운데서 나는 말할 수 없는 깊은 충만감에 빠져들었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왜소한 인간이 느낀 어떤 근원적인 존재감 같은 것이었을까. 그게 알랭 드 보통이 ‘숭고미’라고 말했던 감정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여행의 기술』).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여가활동(취미)은 뭘까. TV 같은 동영상 시청을 빼면 단연 ‘여행’이다. 코로나 팬데믹에 침체기를 겪었던 여행은 최근 그 회복세가 놀라울 정도로 가파르다. 2024년 한국인의 해외여행자 수는 2,868만 명으로 코로나 직전인 2019년의 99% 선을 기록했다. 내국인의 절반 이상이 해외여행을 다녀온 셈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도 극성이다. 일본의 경우 매년 2,000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16% 수준, 중국은 매년 10% 수준인 1억 5,000만 명, 미국의 경우 26% 수준인 약 9,000만 명이 해외여행을 간다고 한다(조선일보, 2025.1.23). 국경이 육로로 열린 유럽을 제외하면 한국인의 해외여행은 거의 세계 최다 수준일 거라고 말한다. 이런 유난스러운 한국인의 여행 사랑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한국인은 삶에 대한 욕망이 유달리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의식과 자존심도 강하다. 자신에 관한 관심은 SNS를 통한 ‘나’의 존재 증명으로 연결된다. 카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나는 이런 멋진 곳에 다녀왔다’고 보여주는 게 힙한 자기표현이 된 지 오래다. 나를 드러내는 건 남들에게 부러움과 인정을 받고 싶은 심리와 통한다.
한국인은 새해가 되면 당연한 듯 계획을 세우고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려한다.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일상을 바꾸고 어떤 목표에 다가가려는 속성이 강하다. 삶을 대하는 주체적인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4명 중 1명은 연초에 ‘연간 여행 계획’을 세운다고 답했다. ‘기대할 것이 필요해서’(47%), ‘삶을 바꾸고 싶어서’(31%)가 이유였다. *여행객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스카이스캐너’의 설문조사(2025.1월).
김경일 아주대교수는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많이 떠나는 이유로 주체성과 주인공 의식이 강한 탓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궁금한 것,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스스로 주체가 되어 해소하려는 욕구가 여행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뉴스1, 2025.1.22).
삶의 변화와 특별함을 찾는 한국인의 욕망은 SNS의 핫플 여행지 도배로 나타난다. 못 말리는 자랑질(?) 욕구 해소의 방법이다. 나만의 여행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은 은근한 우월감 표현이 담겨있다. 하지만 남들 따라 하기보다 독특한 걸 추구하는 한국인의 욕망은 장점도 많다. 세계적인 K컬처 인기의 바탕엔 이런 뭔가 튀어보려는 창조적인 발상과 노력이 중요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늘 삶의 에너지가 펄펄 끓는 것 같다. 생존과 경쟁, 새롭고 다른 것을 향한 열망이 가득 넘친다. 눈만 뜨면 이상한 일이 계속 생기는데 무료할 틈이 없다. 그만큼 한국인은 피로하고 그들의 공간은 온갖 열기로 뜨겁다.
이럴 때 여기 아닌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삶의 특효약 같다. 가까운 제주행 비행기만 타도 느긋하고 홀가분한 기분이 느껴진다. 국내의 오지나 섬, 한적한 동네로 가도 마찬가지다. 대도시의 숨 막힐 듯한 공기에서 잠시 벗어나기만 해도 마음은 설레고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한다.
이렇듯 여행은 익숙한 공간과 장소를 떠나는 재충전 의미가 크다. 아무래도 국내보다 ‘해외여행’ 선호도가 높다. 일상 탈출이라는 여행의 1차적 기대 가치를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여행 전의 기대와 실제 여행경험, 여행 후의 평가에 있어 모두 국내보다 ‘해외’가 우세했다(컨슈머인사이트 조사, 2025.3.25). 해외여행은 ‘갈 때마다 새롭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는 항목에 각각 80% 이상의 응답자가 공감했다. 최근엔 국내 방방곡곡도 인프라가 크게 개선되고 여행지의 색다른 볼거리, 즐길거리가 다양해져서 여행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여행을 자극하고 권유하는 나라다. 우리는 꽃피는 봄가을이나 여름철 휴가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야 정상인 듯한 사회에 산다.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매년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녀와야 한 해를 잘 보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기업은 철 따라 부서별 야외 활동을 독려하며 복지 포인트까지 지급한다.
정부도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선다. 수시로 ‘여행 가는 달’을 지정하고 여행과 숙박을 지원하는 할인쿠폰을 뿌린다. 여행과 관광산업은 소비 회복과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규제가 꾸준히 완화되고 국가의 중요한 성장산업으로 육성 지원한 이유다. K컬처 인기 덕에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과 방문 열기가 이어지는 점도 고무적이다.
한국인의 여권 파워는 현재 세계 최정상권이다.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국가가 190국으로 싱가포르에 이어 일본과 공동 2위다. 국민의 여권 보유율 또한 세계에서 손꼽힌다. 전 국민 대비 일본이 17%, 미국이 50%인데 비해 한국은 60%에 이른다(조선일보, 2025.3.21). 이 같은 차이는 여권 발급비 차이의 영향도 크다. 한국이 5만 원인데 비해 일본은 16만 원, 미국은 24만 원에 이른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가는 문턱이 낮아졌다는 의미다.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 』에서 “여행은 일상의 부재고, 여행을 통해 얻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다.”라고 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자신을 새롭게 보고 성찰의 기회를 갖는 데 여행만큼 좋은 게 없다. 나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유달리 강한 한국인에게 여행은 삶을 이끄는 강력한 에너지이자 휴식을 위한 출구와도 같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욕망의 한국인에게 여행이 사랑받는 이유다.
25년 전 번아웃 위기에 찾아간 스코틀랜드 여행은 이후 힘들 때마다 내게 깊은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준 ‘인생 여행’이었다. 그때 여행은 내게 설렘으로 다가왔지만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였다. 하지만 삶의 행복한 순간은 그렇듯 예고 없이 찾아온다. 문을 열고 새로운 길을 떠나야 내 인생의 순간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 삶의 의외성과 변화무쌍함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 미지의 길로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사람은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개척자다. 오늘도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표지 사진: 스코틀랜드 풍경.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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