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세상에서 나의 행복 방정식 찾기
퇴직 후 몇 년이 지나면서 덜어내는 게 중요해졌다. 연락처의 많은 전화번호 중에 유통기한(?)이 다한 것들을 하나씩 지운다. SNS 톡방은 별도로 작업이 필요하다. ‘마당발’과는 거리가 먼 데도 정리 작업이 만만치 않다. 그간 일하면서 무심코 앱에 저장해 둔 명함 부자의 결말이 아닐까 싶다.
현역 때는 한두 번 볼 사람 같아도 최소한의 관리는 기본이다. 연락처가 늘어나면 든든한 기분도 든다. 일종의 보험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세상 일이란 알 수 없다. 급하고 곤란한 상황이 생겼을 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다.
인간관계만 그럴까.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얻는 순간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스펙이 쌓일수록 가슴 한편이 뿌듯해지는 게 보통이다. ‘부와 성공’의 상징인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집은 한국 사회가 욕망하는 행복의 조건이다. 현대 사회가 강조하는 소비와 성취 중심의 논리도 더하면 더할수록 좋아진다.
하지만 덧셈의 삶은 끝이 없다. 채워도 채워도 더 많은 걸 원하게 되고, 결국엔 결핍이 커진다. 철학이나 종교 전통에서 행복을 ‘덜어내는 과정’으로 보는 이유다. 불교는 집착을 내려놓을 때 해탈에 가까워진다고 하고, 스토아 철학은 욕망을 줄이고 마음을 평정하게 할 때 행복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비교와 집착을 하나씩 빼낼수록 마음이 가벼워지고 평온에 가까워질 수 있다.
최근에 읽은 소설 2편의 여운이 강렬하다. 『완전한 행복』(2021)은 ‘행복의 본질이 덧셈일까, 뺄셈일까’를 묻는다. 인간의 욕망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정유정 작가의 놀라운 필력과 스릴러 본능이 빛나는 작품이다. 주인공 유나는 표면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 사이코패스적 기질과 타자를 지우는 섬뜩한 행복관을 드러낸다.
그녀는 ‘완벽한 가정, 완벽한 관계, 완벽한 자기 통제’가 더해질수록 행복이 완성된다고 믿으며, 끊임없이 소유와 통제에 집착한다. 자기 행복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다. 완벽한 행복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덧셈’이지만, 방해 요소는 잔인하게 삭제한다는 점에서 ‘뺄셈’의 방식이 강렬하고 치명적이다.
실제 주변에서 세상을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본다. 타자와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움츠려 들기만 하는 병적인 경우다. 혼자만의 사는 방식과 이해관계에 집착해 세상과 교감하지 못하는 괴물 같은 사람도 목격한다.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이 큰 사회일수록 그런 현상은 낯설지 않다. 이 소설 또한 수년 전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했던 범죄 사건이 모티브라고 한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덧셈’의 진정한 의미를 물으면서도, ‘뺄셈’의 관점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작가는 2장에서 주인공의 삶을 간명하고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처럼 한 문장이 곧 한 문단이다.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21쪽)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사회가 규정한 ‘성공’의 척도를 충실하게 따른 인물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아내와 자녀를 얻고, 법관으로 출세가도에 들어선다. 그의 삶은 더 넓은 집, 더 좋은 가구,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하나씩 성공을 축적하는, 겉보기에 완벽할 정도로 '덧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마흔다섯이라는 나이에 병과 죽음에 직면하면서 그의 삶은 허망함을 드러낸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온 모든 것들이 사실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아내와 자녀, 동료들은 그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오직 사회적 체면과 품위만을 생각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가식적인 눈길과 동정은 이반 일리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하인 게라심만이 그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순수한 연민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그간 무시했던 ‘진실된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 모든 것을 덜어내고 오직 ‘존재의 본질’만 남긴 채 비로소 평화에 이르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삶의 본질을 가리고 있던 허위와 욕망을 덜어내는 뺄셈의 과정임을 역설하는 것 아닐까.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비판한 톨스토이의 작품은 현대 한국사회,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자연스레 우리가 사는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과연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것일까. 그간 살아온 여정에서 덧셈은 제대로 했으며 갈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뺄셈은 얼마나 하고 있을까.
잘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23년 퇴직한 후 나의 일상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만큼 우리 생애에서 은퇴가 주는 의미와 파장은 크다. 가장 큰 변화는 인간관계에서 확인된다. 업무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면서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소수의 절친 중심으로 단순화했다. 예전의 직장 관련 지인은 거의 만나지 않고 정기적으로 수평적인 만남을 이어간다. 소중한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내는 게 소박한 목표가 됐다.
취미와 여가 생활에서도 변화를 체감한다. 술과 골프는 뺄셈의 영역이 됐고 카페나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책과 영화를 가까이하면서 수시로 글을 쓰는 생활이 자리를 잡았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또한 늘어간다. 여행도 즐거움 중의 하나다. 자주, 멀리는 가지 못해도 아내나 친구들과 종종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잘살고 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모르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결국 중요한 건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 이반 일리치가 그토록 원했던 것 또한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이었을 것이다. ‘철학적 사고’란 그럴 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교훈 중 하나이자 치료제는 우리가 비록 ‘운명’의 주인이 될 수는 없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지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27쪽)
- 로랑스 드빌레르, 『철학의 쓸모』(2024)
진정한 행복은 덧셈이나 뺄셈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 덧셈의 과정에서 결핍을 체험하고 뺄셈을 통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길, 그 경계에 행복의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 행복의 방정식은 결핍과 충족 속에서 균형을 찾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느낀다. 일상을 즐겁게 살며 가까운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게 우선이다.
*표지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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