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교육과 자기 계발에 진심인 나라가 있을까
요즘 도서관(평생학습관)이 은퇴자들의 놀이터가 됐다고 한다. 신문이나 잡지, 책이나 영화를 볼 수 있고 가성비 좋은 점심을 해결하면서 하루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늘면서 생긴 현상이다.
나 또한 도서관 애용자다. 퇴직 3년 차가 되면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치는 일도 잦다. 한 70대 노신사는 넥타이를 맨 경건한 차림으로 도서관을 출입한다. 이제 막 직장을 떠난 듯 말쑥한 출근복 차림의 중년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퇴직한 직후 방황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간혹 이상한 사람도 만난다. 습관적으로 도서관을 어슬렁거리거나(?) 졸음 쉼터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 2층의 명당자리는 늘 같은 가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거의 고정석 같은데 그렇게 일찍 자리를 찜하는 부지런함이 놀랍다. 근데 주인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오후 늦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끄덕끄덕 졸고 있거나 딴짓하는 게 보통이다. 굳이, 왜 도서관에 오는 걸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누구에게나 놀이터 같은 곳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도서관이 마음 편히 놀만한 장소가 아닐까. 사실 은퇴자라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굳이 도서관까지 오진 않는다. 또래 친구들의 사는 방식을 보면 다양하다. 아직 일하는 소수가 있지만 대부분은 산행이나 여행, 골프 같은 취미 활동을 즐긴다. 도시 농부의 재미에 푹 빠진 친구들도 있다.
퇴직 후 도서관의 평생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놀라는 일도 많다. 어학이나 IT, 미술 같은 분야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인문학 공부까지 다양한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70대 이상 시니어 참여자도 상당수다. 인기 강좌는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마감되는 일이 흔하다. 클릭 경쟁을 숨 가쁘게 해야 수강 신청에 성공할 수 있고, 치열한 경쟁 때문에 아예 추첨으로 선정하는 사례도 있다.
도서관에는 자격증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2025년의 한 조사(에듀윌)에 따르면 성인 2명 중 1명이 자기 계발을 하고 있다고 응답했는데, 64%가 자격증 공부, 영어나 외국어 학습이 36%로 나타났다(복수 응답). 도서관의 평생학습 프로그램의 참여도가 높은 이유다.
이렇듯 교육과 자기 계발에 진심인 사람들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한국인만큼 유난한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실제 객관적인 지표는 명확하다. 한국인의 대학 진학률은 70.6%로 OECD 국가 중에서도 단연 1위다. 2025년 교육지표에 따르면 OECD 평균(47.2%) 보다 20% 포인트 이상 높다. 그만큼 대학생 수와 교육에 대한 투자가 많다는 의미다. 한국인의 고교 졸업률은 1980년에 이미 70%를 넘어섰다. 대다수 중진국이 30% 선에 머물던 시절이다.
대한민국 성장의 에너지는 ‘잘살아 보자’는 보통 사람들의 열정이다. 그 열정에 불을 지핀 게 바로 ‘교육’에 대한 뜨거운 의지와 투자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에 가장 가깝게 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와 역사는 그런 사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유교 문화의 오랜 전통과 1960년대 이후 압축 성장의 시대를 거치며 우리는 계층과 신분 상승, 출세와 성공의 원동력이 바로 남보다 뛰어난 ‘학력 자본’이라는 걸 확인했다.
지나친 교육열은 사회의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다시피 했다. 입시와 사교육 문제를 넘어 망국적인 부동산 과열과 지역 간 격차의 주원인으로 작용했다.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사회 곳곳에 만연한 경쟁과 압박은 젊은 세대를 피로와 스트레스 상태로 내모는 요인이 됐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행복 지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희망적이다.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의 폐허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기적을 이뤘다. 아프리카 수준의 후진국에서 불과 40여 년 만에 선진국으로 진입한 것이다. 정치, 경제, 기술, 환경 등 제반 분야에서 세계의 거센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 게 주효했다.
2024년 세계적인 작가의 한국방문 유튜브 영상이 우리를 강타했다. 『신경 끄기의 기술』의 마크 맨슨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국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라라고 하면서, 역사를 통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한국인의 ‘회복탄력성’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는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저성장과 부동산 과열, 심각한 저출산과 고령화, AI 대응 등 위기를 전하는 목소리가 높을수록 역설적으로 해결을 향한 노력과 희망을 본다. 역사의 시련과 위기 앞에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대응한 한국인의 저력을 다시 기대하는 이유다.
K컬처의 세계적인 인기는 한국인에게 또 다른 기대감을 준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석권,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비롯한 최근 한국문화 열풍은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을 재확인하게 된다. 국운이 다시 상승한다는 걸 체감하기 때문이다.
K컬처를 통해 세계인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 이어지고 있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행복 지수의 중요한 요소인 자아 존중감이나 긍정적인 정체성 형성과 연결된다.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로 행복한 강국’이 멀리 있지 않다.
한국의 눈부신 발전은 결국 한국인 개개인에게 그 씨앗이 담겨 있다. 돌아보면 교육은 우리 가족의 삶 또한 바꿨다. 척박한 남도의 산골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2시간 거리를 걸어서 읍내 학교에 다녔다. 그의 인생을 일으킨 건 교대 졸업과 교직 생활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빠른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한국 현대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한국인 각자에게 이처럼 많은 이동과 변화의 여정을 경험하게 했다.
나는 여전히 교육과 자기 계발에 관심이 많다. 그만큼 성장의 욕망이 남다른 한국인 특유의 DNA를 가졌다. 도서관에 가면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놀아도 도서관에서 놀아야 맘 편한 사람들도 있다. 물론 도서관에만 있는 건 아니다.
날마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한국인은 새롭고 도전적인 목표를 향해 본능적으로 달린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한 걸음 가려는 발걸음에서 우리의 미래를 본다. 여전히 한국이 희망적인 이유다.
* 표지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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