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한국 사회, 모멸감을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법
청소하다, 운동하다 불현듯 욱하며 떠오르는 옛 장면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히지 않고 나를 짓누르는 기억이다. 가슴 밑바닥 깊숙이 남아있다 갑자기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 바로 ‘모멸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욕망의 나라, 한국 사회는 유달리 더하다. 한국 영화의 위상을 세계인에게 각인시킨 <올드 보이>(2003)는 '모멸감'이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섬뜩하게 그린다.
모멸감의 역사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크고 작은 그런 순간들이 떠오른다. 친구들과 중학교 하굣길에 느닷없이 무릎을 까였다. ‘끝말 이어가기’하던 우리가 무심코 내지른 단어가 우연히 지나가던 꼰대(?) 선생의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이런저런 장난을 치다 벌 받을 때의 쪽팔림도 사라지지 않는다. 큰 잘못도 아닌데 억울한 마음이 들면 더 오래간다.
일회성 해프닝 같은 소싯적 일이야 아련하지만, 직장에서 당한 모욕감은 마음속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다 어느 순간 분노로 폭발한다. 수직적 위계질서가 만연한 한국 사회는 높은 계급과 지위, 능력과 성과가 최고 가치다. ‘아랫것이 윗분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순간은 어디 하소연도 못 한 채 자책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싫어지고 상대를 패주고 싶은 순간이다.
모멸감은 나의 존재가 타자에게 송두리째 부정되거나 무시될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다. 모멸감을 받은 자는 단순히 상처 입는 데서 끝나지 않고,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축적해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을 향한 혐오나 공격성으로 표출하기 쉽다. 심할 경우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의 건강성을 훼손하는 고질적인 병리 현상으로 치닫기도 한다.
김찬호 교수의 『모멸감』(2014)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어둡고 억압적인 감정 구조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모멸감에 관한 실제 경험, 인문학 문헌, 대중 매체 등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를 인용해 인간의 감정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모멸감의 바탕에는 ‘비교와 우열’이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 대부분이 우월감으로 보인다.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났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증명하는 데서 살맛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내가 못났다는 것이 드러나면 곧바로 불행감에 빠져든다. 비교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그것을 인정받는 게임에 몰두하다 보면, 행복과 불행의 양극을 오가는 진자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99쪽)
한국 사회는 연령, 학벌, 직위, 성별 등 다양한 위계가 공고히 작동한다. 존중을 표한다는 명목 아래 사실상 차별적 위계질서가 강화되며, 그 과정에서 모멸이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나이나 스펙부터 따지는 행동은 암묵적인 서열 확인이자 타인의 존재를 규정짓는 모멸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고질적 현상이다.
한국의 압축 성장 과정은 놀라운 성공 에너지로 발현했지만, 개인과 사회 곳곳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는 ‘부와 성공’이다. 학벌주의, 취업 경쟁, 외모지상주의 등에서 낙오한 개인은 쉽게 무가치한 존재로 낙인찍히고 ‘루저’나 ‘실패자’로 전락한다.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분위기에서 사회 소수자(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는 구조적인 모멸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한국 사회만큼 자기혐오가 심한 나라가 있을까.
어느 시대에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 마련인데, 갈수록 그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한다. ‘호모글로벌리스’로 살아가는 대다수 현대인은 좌절감 또한 커진다. 실존주의 심리학자 카를로 스트렝거는 이를 ‘시시함의 공포’라고 말한다. 세계의 글로벌 수준이 심화할수록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느끼는 두려움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속도감에서 전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한국 사회는 앞만 보고 치열하게 달려도 생존이 만만치 않다. 사회 구석구석에는 갑을관계를 드러내는 권력의 생리가 뿌리 깊게 작동한다. 때로는 모멸의 순간을 견뎌내는 ‘맷집’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잡초근성이나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할 필요도 있다. 강한 승부욕과 추진력을 발휘하는 극소수만이 성공의 기회를 잡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비교와 우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일레인 아론의 『사랑받을 권리』(2020)는 두 가지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ranking’(등급 매기기)은 상하의 수직 개념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linking’(유대 맺기)은 그런 위계를 떠나 편안하게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단순화한 방식이지만, 사람의 행복은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의 인간관계가 많은가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내 인간관계는 어떨까. 한창 일할 때는 일 중심의 수직적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사회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낮에는 일로, 저녁엔 술자리로, 심지어는 주말까지 일의 연장인 관계가 이어지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그런 관계를 마냥 지속할 수는 없다. 자신의 인간관계를 차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퇴직 3년 차, 지금 그렇게 만나는 사람은 내게 없다. 일로 만난 사람의 9할은 일상에서 사라지고, 인간적인 정과 품위를 가진 소수의 사람만 남았다. 일을 떠나면서 나는 퇴직자(OB) 모임에 가지 않는다. 예전의 수직적인 이해관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처음엔 경조사가 마음에 걸렸지만, 내게 발생한 경조사도 가족과 절친 위주로 최소화하면서 정리했다. 대신에 갈수록 수평적인 관계가 활기를 띠고 있다. 상황 변화에 걸맞게 인간관계의 변화도 만들어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김찬호 교수는 인간적인 존엄과 타인과의 공감을 회복함으로써 더 건강한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 존중의 문화가 필수적이다. 나이, 성별, 직위와 무관하게 타자를 독립적 주체로 인정하는 관계 맺기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장소부터 달라질 필요가 있다. 가정·학교·직장에서 권위와 서열 중심의 관계가 아니라, 다정한 인간관계가 기본 규범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그 출발은 개인의 자각과 역할이다. 우리는 모멸감의 근원인 비교와 우열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에 치명상을 준 사람들은 이미 내 삶의 무대에서 떠났다. 한때 완장 같았던 그들의 권력도 사라졌다. 더 이상 자책하는 건 인생의 낭비다.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에게 집중하자.
삶의 행복을 외부에서 구하지 않고 자기 기준에 맞추면 누구나 소소한 일에 만족할 수 있다. 결국엔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채우는 게 모든 변화의 시작이다.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삶의 충만감을 만들어가면 행복은 멀지 않다.
*표지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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