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나라, 한국에서 다정함으로 살아가기
요즘 부쩍 ‘다정함’에 끌린다. 우리 삶에서 다정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갈수록 실감하고 있어서다. 한창 일할 때는 능력이나 전문성에 끌렸지만, 시간이 흘러도 오래 남는 건 인간적인 정과 다정한 마음이라는 걸 절실히 느낀다.
직장 동료나 선배 중에 지금 만나는 이는 손에 꼽는다. 일 잘하던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다. 동료들에게 친절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감정을 잘 헤아리는 행동은 내면 깊이 오래 공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동경하는 모습이다.
최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브라이언 헤어 & 버네사 우즈, 2020)를 읽었다. 제목부터 강하게 끌렸는데, 진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쉬운 설명과 풍부한 사례로 풀어낸 점이 흥미롭다. 인류가 지구상의 지배적인 종이 된 이유로 기존의 진화론이 ‘적자생존’과 ‘경쟁’을 중심으로 설명했다면, 이 책은 ‘공감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다정함’이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느낄 때 행복은 더 달콤한 것이 된다. 죽음으로 떠나보낸 누군가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리라고 믿는다면 슬픔은 더 견딜 만한 것이 된다.” (41쪽)
누군가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공감’을 느끼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이런 마음은 인간 조건의 출발이자 슬프고 힘들 때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까지도 넘어서게 하는 것, 바로 ‘다정함’의 힘이 아닐까 싶다. 진화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작용했다니 새삼 그 위력을 돌아보게 된다.
인용 구절을 읽으며 불현듯 2011년 교통사고로 떠난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큼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떠난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가족이 아니라 한 남자,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됐다.
남도의 산골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평생 분주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대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도시 읍내와 광역시 광주로 인생의 험로를 따라 숨 가쁘게 달리다가, 50대 후반 뜻밖의 건강 문제로 교직에서 명퇴했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했지만 따뜻한 편은 아니었고, 평생 가정을 이끌었지만 가정적인 분은 아니었다.
내게 가장 아쉬운 점은 생전에 ‘인간적인 대화’를 충분히 나누지 못했다는 회한이다. 일상적인 안부는 주고받았어도 당신 자신의 삶이나 세상을 사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별로 없다. 우리 시대 많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데면데면한 관계가 지속된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로 이어진다. 나이 들수록 아버지를 닮아가는 한 사내가 보인다. 동시에 달아나려는 모습도 보인다. 아버지와 내 삶이 겹쳐지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다정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산골을 벗어나려 눈앞의 세상을 향해 달리면서 정작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았나 싶다. 욕망의 한국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욕망과 다정함
사실 욕망의 나라, 한국에서 살면서 욕망과 건강하게 관계 맺기란 쉽지 않다. 눈만 뜨면 더 빨리, 더 많이 거머쥐려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 속도와 구심력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 우리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흐르면 타인을 도구화하기 쉽다.
따라서 자신이 아니라 타자와 외부의 관점에서 욕망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욕망의 무게를 조절하는 힘이 바로 ‘다정함’이다. 다정함은 ‘사회적이고 관계적’이다. 단순한 친절을 넘어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감응하면서, 스스로 욕망에 휩싸여 폭주하지 않도록 붙잡는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는 위기의 상당 부분은 욕망과 다정함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높은 성취, 더 많은 재화, 더 두드러진 인정을 욕망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다정함의 언어는 사라지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선 혐오의 말들이 난무하고 직장에선 소모적 경쟁이 벌어진다. 심지어 가까운 인간관계조차 ‘내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지’만을 따진다. 욕망 과잉 사회의 어두운 풍경이다. 이런 사회라면 성취의 속도는 빨라져도 공동체의 신뢰는 점점 붕괴한다.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일상생활에서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내게는 자신을 찬찬히 돌아보는 ‘아침 10분’이 루틴이다. 매일 한 문장 필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어서 3분 기도, 오늘 하루에 감사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잠시 묵상한다. ‘미용감사’(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속으로 되뇐 후 식탁에서 아내를 보면 절로 고마운 생각이 든다. 웬만해선 좋은 말이 나온다. 아내가 가끔 “당신 실없는 소리가 늘었어”라며 농반진반 같은 칭찬을 건넨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취침 전엔 ‘3줄 일기’를 적는다. 그날의 아쉬운 일, 좋았던 일, 그리고 내일을 위한 다짐이 주 내용이다. 편리함 때문에 스마트폰 캘린더앱을 이용하지만 나름 효과는 크다. 하루를 감사의 마음으로 정리하며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다.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내게 부족한 ‘다정함’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굳이 의식한다기보다 단순하게, 상대에게 경청하며 공감하는 태도를 가지려 한다. 다음 날 친구와 약속이 있으면 3줄 일기엔 늘 ‘정성과 친절을 다하자’며 미리 나를 다독인다. 예전에 아내가 “당신은 눈치는 보는데 눈치가 없다”고 말하곤 했는데, 요즘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상대의 눈이 아니라 마음을 헤아리는 연습 덕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인 관계와 연대도 중요하다. 이번 여름부터 전문적인 ‘독서클럽’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직업과 연령,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는 시간은 각자의 개인 삶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내가 배우려는 건 역시 그들과 공감하고 협력하는 소통의 기술이다. 거창한 사회 운동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일상에서 다정한 모임을 늘려가면 앞으로의 삶도 보다 건강해질 것이다.
욕망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 완전히 비우는 무욕이나 절대적인 충족이 아니라 적절한 관계 속에서 욕망과 함께 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절제와 거리 두기도 좋지만 조화 속에서 다정해지는 것이다. 한국은 욕망 과잉의 사회 같아도 여전히 다정함이 살아 있다. 특히 재난 상황에서의 사회적 공감과 연대는 희망을 준다. 세월호 참사, 팬데믹 등 위기 상황에서 한국 사회는 기부와 자원봉사 등 집단적 다정함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현대 한국 사회는 욕망을 통해 성장했지만 다정함을 잃을 때 공동체는 붕괴하기 쉽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을 억압하는 도덕이 아니라 가까이 길들이면서 공감과 협력의 장으로 이끄는 실천이다. ‘다정한 욕망’을 우리 일상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까칠한 사람이었다. 뒤늦게나마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에게 가닿으려 노력하는 것만도 다행스럽다. 삶에 조금이라도 다정함을 채워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아들이 다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아버지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다정함은 슬픔도 견디게 하고 죽음의 상실감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지금 오늘을 잘 살기 위해 더없이 필요하다.
*표지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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