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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욕망과 절제된 미학의 사이

수안보와 ‘뮤지엄산’, 한국 사회의 욕망을 보여주는 두 장소

by 김성일

내 몸을 사랑하자


추석 연휴 직전 고향 다녀오는 길에 두 곳의 여행지에 들렀다. 온천 명소 수안보와 원주의 ‘뮤지엄산’이다. 무더위가 가시면서 오랜만에 방문한 온천은 피로에 지친 몸을 풀며 휴식하기에 좋았다. 코로나를 겪으며 사우나를 잊고 지낸 터라 내친김에 세신과 함께 코인 안마의자에 누워 잠시 마사지도 받았다.


문득 벽에 붙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내 몸을 사랑하자’. 생각해 보니 이런 시간이 얼마만인가. 퇴직 후 출근할 사무실은 사라졌어도 뭐가 그리 바쁜지 거의 매일 집을 나선다.


온천을 경험한 시간은 내 몸을 직접 느끼고 감각한 시간이다. 목욕탕에 들어서면 우리는 누구나 몸에 솔직해진다. 모든 겉치레를 내려놓고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취약한가, 특히 나이 들수록 점점 초라하고 볼품없어지는 자기 몸과 마주한다.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도시의 흥망성쇠


수안보 거리는 쇠락한 도시가 보여주는 쓸쓸함이 짙게 풍겼다. 낡은 건물, 촌스러운 간판, 좁은 길과 울퉁불퉁한 도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썰렁한 식당들은 산채정식, 꿩샤부샤부, 버섯전골 같은 엇비슷한 추억의 메뉴 일색이었다.


도시에도 흥망성쇠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난다. 인간이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듯이 도시 또한 세상의 욕망을 따라 변화와 부침을 겪는다. 수안보는 단순히 쇠락하는 도시가 아니라, 우리에게 도시와 인간의 운명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활기가 사라진 도시는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우리의 노년을 떠올리게 한다. 연민과 동질감이 느껴진다.


수안보는 한때 근대적 휴양의 상징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이용한 ‘왕의 온천’이라는 자부심으로 온천 관광의 1번지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과 산업화가 절정에 달했을 때 온천은 성공의 욕망을 집단으로 발산하고 피로를 씻어내는 곳이었다. 중산층의 부와 여유, 자기 과시를 확인하는 장소였다. 온천(호텔)은 신혼여행, 가족여행, 단체여행으로 인기를 끌었고, 기업과 공공기관의 단골 연수 장소였다. 수안보의 쇠락은 이 같은 집단적 욕망이 점차 다변화된 개인 취향에 밀려나기 시작했다는 씁쓸한 증거가 아닐까 싶다.



뮤지엄산의 인파와 활기


뮤지엄산은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수안보에서 멀지 않아 서울 귀갓길에 들렀는데 여행에 까다로운 아내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2013년에 개관해 이미 핫플로 알려져서인지 입구부터 차와 사람으로 붐볐다. 완만한 산을 따라 들어선 뮤지엄은 주위의 울창한 산, 푸른 숲들과 잘 어우러져 아늑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안도 타다오의 미니멀한 건축, 자연과 예술의 조화, 고요와 여백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금세 색다른 분위기에 휩싸였다. 야외 조각공원과 빛의 공간, 물의 정원을 따라 거닐면서 가을의 청량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군데군데 사진을 찍었다. 변화하는 취향과 트렌드를 반영한 듯 가는 곳마다 세련된 장식과 조경, 건축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본 입장권 23,000원, 테라스카페의 아메리카노 10,000원 같은 가격대가 수준을 말하는 것 같다.


날이 흐려져 가는 비가 내리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즈넉하고 신비로워졌다. 어떤 장소와 공간이 이처럼 극적으로 달라진 사례도 많지 않을 것이다. 뮤지엄이 들어서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산이었을 텐데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됐다. 공간과 장소의 변화도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다.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이용할 수 있는 테라스 카페의 풍경 ⓒ김성일



욕망의 시대 변화


뮤지엄산은 욕망의 새로운 방향을 선명히 드러내는 장소다. 이곳에는 뜨거운 욕망 대신 ‘절제된 미학’이 있다. 과거의 수안보가 육체적 치유를 약속했다면, 뮤지엄산은 ‘정신적 치유’와 연결된다. 산업화 시대의 욕망이 집단적인 소유와 물질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지금 시대의 욕망은 ‘새로운 경험과 취향’을 쫓는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장소 모두 ‘치유’를 말한다는 것이다. 치유의 방식은 다르다. 수안보에서 몸의 피로를 씻어내는 즉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뮤지엄산은 정제된 감각과 사색을 통한 ‘느림의 미학’을 제공한다.


두 장소는 각자의 시대에 맞는 욕망이 담겨 있다. 결국 인간의 결핍은 여전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극명한 대비는 한국 사회의 욕망이 물질적인 결핍의 해소에서 ‘정신적인 풍요의 추구’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수안보를 계속 찾는 이유


하지만 수안보의 쇠락이 욕망의 종말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욕망의 변신이고 회복의 가능성 또한 내포한다. 수안보에서 우리는 여전히 ‘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처럼 체감한다. 뜨거운 물에 여기저기 뭉친 몸을 담그면서 피로를 풀고 생기가 돌게 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마음과 정신 또한 맑아진다.


다양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충주시는 왕의 온천이라는 천연 온천수의 가치를 극대화해 현대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웰니스(Welliness)’ 관광지로 전환하려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수안보에서 우리 부부는 의외로 편한 구석도 발견했다. 북적북적 인파와 부딪칠 일이 없었고 한적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분위기가 색다른 로컬 카페에서 잠시 책을 읽으며 카공을 즐겼다. 부지런한 검색 끝에 맛집도 발견했다. 15,000원 가성비 정식은 반찬이 20가지에 찌개와 생선까지 나왔다. 담백한 나물이 아주 맛깔스러웠고, 특히 ‘청국장’은 아내가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고 해서 다음 날에도 찾아갔다.


여전히 수안보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과거의 영광과 인기는 수그러들었어도 휴식에 대한 욕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을 회복하는 곳에서 비로소 쉼과 사유 또한 들어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수안보를 거쳐 뮤지엄산으로 여행한 것은 절묘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육체적 치유와 정신적 치유가 연결되고 동시에 이뤄지면 더할 나위 없다. 적절한 균형 속에서 추구하는 변화가 중요하다. 우리 부부는 다음번에도 수안보와 뮤지엄산을 찾을 것이다.





*표지사진: 뮤지엄산의 워터 가든 모습 ⓒ김성일




1인 15,000원의 가성비 한식당 상차림 ⓒ김성일



흐린 날 책 읽다 멍 때리기 좋은 한적한 동네 카페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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