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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Sep 21. 2020

내일부터 중간고사다. 오늘 나는 경마장에 간다

경마 이야기

1990년경 입사 초기 5년 여 간 하숙을 했다.


지금은 서촌이라 불리는 곳, 광화문에 있던 사무실에서 가까운 필운동의 한옥집이다. 사직공원과 배화여고가 근처에 있었고, 영화배우 김혜수가 그 여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다.


나이가 비슷하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하숙집 동료 몇 사람은 종종 같이 어울렸다. 앞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직장 이야기를 하고, 어둠이 내리는 황혼 무렵에는 동네 슈퍼마켓의 평상이나 시장통 허름한 집에서 술을 마셨다. 흥이 나면 디스코장 나들이도 하였다. 거기서 만난 여자와 나중에 살림을 차렸다는 한 친구의 소식도 들렸다.


휴일에는 가끔 과천의 경마장에 갔다.

경마장으로 그들을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내가 경마를 알게 된 것은 입사 동기인 친구 L 덕분이다. 그 친구는 지금의 과천으로 이전하기 전에 경마장이 있었던 뚝섬 근처의 대학교를 다니며 고시 반에서 공부를 했다. 시험 결과 발표가 있는 날이면 수험생들은 어김없이 경마장을 가는데, 고시반으로 돌아올 때면 합격인지 불합격인지를 알리는 - 색깔이 각기 다른 - 운명의 깃발이 창문에 내걸린다고 한다.




그즈음 읽은 어느 시인의 글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젊은 시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겪었던 청춘의 방황기를 기록한 것이었다.


“……. 내일부터 시험인데 나는 오늘 경마장에 갔다. 말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내 젊은 날의 외로움과 불면을 생각했다…….”


대략 런 취지의 글이었다. 내용도 다소 강렬하고 자극적이었지만 경마장의 분위기는 어떤 것일까 야릇한 흥분 같은 것이 불현듯 엄습했다.


친구 L을 따라 뚝섬의 경마장에 처음 갔을 때 내가 느꼈던 마력적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고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말들이 갈기를 세우며 기수와 일체가 되어 달리는 모습은 멀리서 봐도 짜릿했다. 근육을 불끈 세우고 콧김을 날리며 질주하는 말들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내가 배팅한 말이 마지막 코너를 돌며 질풍 같은 속도로 스퍼트를 하는 모습을 보면 온몸의 피가 나도 모르게 거꾸로 설 지경이었다. 마지막에 선행마를 따라잡으며 아슬아슬하게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이면 흥분과 쾌감은 무아지경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 순간 모든 현실을 잊는다. 마치 마약이나 환각제가 그런 기분일까? 그 순간이라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 바로 축제에서 느낄 수 있는 몰입과 엑스터시의 경지가 그런 것 아닐까?


경마장에 가면 대개 배팅을 한다.


두 부류가 있는데, 안전하게 가는 초보와 한 건을 노리는 꾼이다. 나는 재미 삼아 한 번에 보통 5천 원 내외에서 몇 마리 말에 포트폴리오로 승부를 걸고는 다. 하숙집 동료 K형은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인데 의외로 내기를 즐겼다.


그는 미리 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경마 정보지’의 분석을 정독한 후에 반드시 한두 군데만 승부를 집중했다. 그는 기대 이상으로 감이 뛰어난 승부사였다. 50만 원 배당을 적중시켜 사당역 근처에서 술을 거나하게 산 적도 있었다. 얼마 후 우리 대부분은 점차 경마장에 시들해졌는데, K형은 여전히 주말만 되면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고는 했다. 한두 해가 지나면서 다니던 직장을 옮겼다는 그는 하숙집에서 점점 보기가 어려워졌고 결국에는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설마 경마 때문에 패가망신한 것은 아닐까?




경마는 흥미로운 스포츠다. 산업적으로도 큰 규모를 자랑한다.


경마의 기원은 말을 가축화한 시기와 거의 같을 만큼 오래되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고대 올림픽 경기에 말 경주가 기록되어 있다. 경마라는 용어는 12세기 영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 점차 스포츠로서 규칙과 저변을 확대해나갔다. 1780년 현대 경마의 기원인 더비(Derby) 등 클래식 경기가 차례로 창설되어 19세기 초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비되었다. 이후 여러 나라로 전해져서 오늘날은 대중성이 강한 스포츠 오락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마가 열리고 있다.


대중성과 오락성이 큰 경마는 사행산업으로 관리되고 있다. 2007년부터 국무총리 산하에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라는 국가기구가 설치되었다. 도박 성격이 강하여 이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중독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른바 ‘사고 칠 위험’이 많다는 우려 때문이다. 사행산업에는 경마뿐만 아니라 경륜, 경정, 카지노, 복권, 체육진흥투표권(스포츠 토토)이 포함되어 있다.


사행산업 중 가장 큰 매출 규모를 자랑하는 업종은 단연 ‘경마'다.


2015년 경마의 매출은 7조 7322억 원으로, 사행산업 전체의 37.7%에 이른다. 다음으로 매출이 많은 복권(17.3%)과 비교해 두 배 이상 높다. 경마장을 찾은 입장객 수는 1361만 7000명에 달한다. 과연 경마의 대중적인 인기와 선호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행산업으로 조성된 공익자금은 재정 당국이 총괄적으로 관리하면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곳에 쓰인다. 1997년부터 복권기금을 조성하여 문화예술, 복지, 스포츠 등에 지원한 영국은 이 분야의 선진국으로 꼽힌다. '스포츠 복권 프로젝트'를 가동하여 런던올림픽이 끝난 직후 2013년부터 리우 올림픽 출전 종목에 3억 5천만 파운드(약 5057억 원)의 통 큰 투자를 감행했다. 정부 차원의 과감하고 전략적인 투자로 영국은 ‘부동의 2위’ 중국을 제치고 메달 순위 종합 2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08년 자국에서 열린 런던올림픽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이후 108년 만에 최고의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처럼 경마는 사람들의 여가와 레저생활 가까이에 있으면서 국가적으로 경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승마는 올림픽의 한 종목으로도 유서 깊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모두 사회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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