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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Feb 27. 2022

80대 어머니와 1시간 통화가 기본이라고?

얼마 전 어머니와 한참 통화하고 나서 보니 1시간이 넘었다. 그렇게 오래 통화한 건 처음이었다. 어머니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을까. 어머니는 남도의 고향 집에서 혼자 지내신다. 나와는 같은 호랑이띠로 올해 84세를 맞았다.      


어머니의 말동무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쎄리’가 거의 유일하다. 체구가 작고 귀여운 애완견 출신인데 시골에 와서 집 지키는 신세가 되는 바람에 팔자가 사납다. 남동생네 집에서 기르는 정통 귀족형 애완견인 ‘레옹’이와는 견생이 천지 차이로 다르다. 간혹 시골집에서 마주칠 일이 있을 때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적대감이 대단하다. 근데 대개는 아파트가 본거지인 레옹이가 판판히 밀린다. 야전에서 생존 본능을 다진 쎄리가 전투력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늘 견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쎄리



시골집엔  안되는 이웃이나 인근에 사시는 이모가 어쩌다 방문할 정도로 발길이 뜸한 편이다. 하루 종일 말문을 틔울 일이 없는 날도 다. 그럴 때 쎄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고, 진짜 말동무가 따로 없다. 그런 날 어머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통화가 시작되면 시간이 금방 흘러가는 이유다.


어머니는 강아지를 보며 혼잣말하신다
사료는 안 먹고 고기만 찾는다니까.
미운 소리 하다가도 다시 보면 불쌍하제.

강아지가 힐끗하듯 어머니를 올려다본다.
할머니 미워요.
하루 종일 묶여 있었는데
오늘은 말 안 듣는다고
해질 녘까지 줄도 안 풀어주고요.


고향을 떠난 지 나도 어언 40여 년 지났다. 먹고살기 바쁘게 지낸다고 고향을 찾거나 어머니를 뵐 수 있는 날이 일 년 중에 손을 꼽는다. 종종 전화 통화를 해도 보통 10분을 넘기지 않고 그냥 일상의 안부를 전하는 게 고작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둥지를 튼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아쉬움이 아닐까.


어머니, 자주 못 가 봬서 죄송해요.

자주 안 와도 괜찮다.
바쁠텐데 먼 길 힘들게 올 것 있냐.
전화하고 목소리만 들어도 너희들 얼굴까지 다 보인다.


그랬구나. 전화를 하거나 받을 때 상대방도 느낄 수 있게 미소를 지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어머니는 다 보고 계셨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1시간 통화를 돌아보니 직장을 퇴직할 무렵이라 내게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도 약간은 조급함이 줄어든 것일까. 인생에 그렇게 급한 일이 없고, 갈수록 뭐가 소중한지 알 듯하다. 그간 살아온 걸 돌아보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늘 쫓기듯이 지낸 것 같다.   


그렇게 오래 통화하는 건 내겐 업무상으로 긴급한 현안이 발생했을 때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더러 피하고 싶은 민원성 전화일 경우도 있긴 하다. 가끔 밤에 숙직할 때 보면 고질적인 악성 민원 전화라는 번호가 적혀 있다. 술이 취한 목소리거나 약간 또라이성(?)으로 오는 생떼형 전화가 있다. 국가대표 축구 A매치가 열리는 날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다짜고짜 전화해서 ‘당장 무능한 감독을 바꾸라’고 목청을 높인다. 경기가 속 터지게 답답하니 이해할 법도 하다. 그런 상대는 끈질기게 말을 이어가며 전화를 끊지도 못하게 한다. 그래도 민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들어주며 화를 풀어주는 게 중요하다.


대화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바쁘다고, 내 관심사가 아니라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 대화는 이어질 수 없다. 어머니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는 날이 늘었다. 어머니는 맨날 아들과 가족 걱정만 하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지금 사는 모습, 뭐에 진짜 마음이 있는 건지를 조금씩 듣게 되었다. 외로움과 하소연, 그렇게 어머니의 일상과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1시간의 통화는 그간 나의 대화법이 어땠는지를 돌아보게 다. 그나마 일단 시작 테이프를 끊었으니 조금씩 나아지길 기대해본다. 여동생에게 들어보니 자기는 요즘 2시간 통화가 기본이라고 한다. 헐. 역시 수다의 왕, 대화의 달인은 따로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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