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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r 27. 2022

뜻밖의 만남으로 제주에서 '개취'를 발견하다

- 노바디 여행자, 뚜벅이로 제주를 걷다(2)

3월 초 제주의 날씨는 따사로웠다. 봄기운이 물씬한 햇살 아래 서울에서 입고 온 패딩은 어느새 무겁게 느껴졌다. 뚜벅이 여행이라면 짐이든, 일정이든 가볍게 움직이는 게 최고다. 느긋하게 이동하더라도 현지 날씨나 상황을 미리 확인하고 대비할 필요도 크다. 이번 제주 여행은 '여행자'라기보다 가능하면 생활인의 한 사람으로 일상 속에 머물고자 했다. 제주의 풍경 속으로 최대한 스며드는 게 목표였다.


일정은 극도로 단순했다. 첫날 점심부터 떠나는 날 저녁까지 4일을 풀로 보내는 동안 숙소, 길, 카페(아니면 식당)가 주요 동선이었다. 숙소를 나서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카페가 아닌가 싶다. 차나 커피를 마시는 곳을 넘어 이제 카페는 휴식과 힐링, 위로와 사색의 공간이다. 제주에는 멋진 카페가 정말 많다.


아름다운 '애월의 카페거리'에는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탁 트인 푸른 바다 뷰를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는 웬만한 운발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내와 나는 무조건 1시간 먼저 움직였다. 점심을 보통보다 이른 11시쯤 먹고 남들이 밥을 먹는 12시경에는 카페의 명당자리를 노크했다. 아니다 다를까 행운이 따라왔다.


애월 카페거리에서는 눈부신 제주 바다를 지천으로 만날 수 있다.





무시했던 그 커피가 '개취'의 신세계로 이끌다


나는 약간 쓴맛의 진한 아메리카노를 즐겨왔다. 오전과 오후 하루 2번의 커피타임은 내게 휴식이자 일을 시작하기 위한 워밍업의 리추얼이었다. 점심 약속이 없는 날은 일부러 조용한 카페를 찾아 혼자 커피를 즐기는 경우도 많다. 조금만 시간을 낸다면 그 이상의 여유를 찾으면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 그렇게 충전이 되면 누구에게도 정성을 다할 수 있는 법이다.

  

익숙한 삶의 공간이라면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단골이든, 봐 둔 집이든 찾아가면 되니까. 근데 여행지나 낯선 곳에 일을 보러 가면 조금 불편하다. 하루에 두 잔은 마셔야 하는 커피도 마땅한 장소를 만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중독이 된 건지 커피를 거르면 뭔가 허전하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도 그랬다.


첫날 숙소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만났다. 소박하고 정갈한 종이에 포장된 드립백이 있었는데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간 드립 커피를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약간 무시했다고 할까. 드립 커피는 조금 싱겁다고 생각했다. 예전 몇 번의 시음이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 맛을 제대로 모른 셈이다.    

  

둘째 날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간단히 먹고 나니 급 커피가 당겼다. 마침 드립 커피가 있으니 한번 시도해 봤다. 다음 날은 비치된 다른 종류의 드립 커피도 마셨다. 내가 그간 즐기던 커피와는 뭔가 달랐다.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와 만나 방울져 떨어지는 걸 바라보는 느낌이 괜찮았다. 몇 분 후 잔을 채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생생한 향과 풍미가 입안으로 퍼지면서 이내 온몸으로 전해지는 게 느껴졌다. 숙소의 창밖 바다 풍경과 어우러져 더할 수 없이 좋은 순간이었다. 커피 마니아들이 커피콩을 고르고 직접 갈아서 내려 먹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직접 해보니 시간을 음미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빠르게 기계에서 뽑아내는 커피와는 분위기가 꽤나 달랐다.     


예전에 원두를 사다 집에서 갈아 마셨던 게 기억났다. 그때는 몇 번 만에 시들해지고 말았다. 아직 원두커피 맛에 눈을 뜨기 전이 아니었던가 싶다. 집이 아니라 낯선 곳, 제주에서 만난 드립 커피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드립 커피세트가 주방 한쪽에 처박혀 있다는 것도 문득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하나씩 마신 후 아예 새로운 핸드드립 커피 6종 세트를 주문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브라질 산토스, 콜롬비아 슈프리모, 과테말라 안티구아, 인도네시아 만델링, 케냐 AA... 어떤 걸 먼저 골라 마셔볼까.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설렘 모드에 휩싸인다.


어느새 조금씩 드립 커피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천천히 시간을 응시하며 내가 좋아하는 걸 기다리면서, 그 시간이 준 선물을 몸으로 체감하는 재미가 커져간다. 이렇게 느리게 사는 것이 내게 맞는 옷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참, 취향의 발견이란 게 별거 아니구나. 이러다 언젠가 바리스타에 도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취향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닐까 싶다. 취향의 총합이란 게 결국 나라는 존재를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다운 것의 발견과 표현이 뭘까를 늘 생각했는데 제주에서 어렴풋이 알았다. 궁하니 통한 것일까. 어쩔 수 없이 시도했는데 뜻밖에 복이 굴러들어 온 셈이다. 새로운 취향을 만들려면 예기치 못한 상황과 우연을 두려워해선 안된다는 걸 실감했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때로 계획이 틀어지고 당황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인생은 또 다른 기회와 행운을 주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면 의외의 순간 앞에 '날것의 삶'이 이어진다. 우리가 늘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꾸는 이유가 아닐까.   



커피 앞에 우리는 잠시 멈춘 채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뚜벅이 여행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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