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Mar 20. 2022

노바디 여행자, 뚜벅이로 제주를 걷다


제주에 다녀왔다. 코로나 때문인지 3년 만이다. 절친한 선배가 제주도민이라 벌써 20년 가까이 거의 매해 제주를 찾는다. 제주는 가깝고도 특별하다. 개인적이든 업무적이든 쉽게 오가는 곳이지만 뭔가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 안의 외국' 같은 곳이어서 제주 여행은 늘 설렘과 함께 시작한다.      


이번 제주 여행은 조금은 달랐다. 노바디의 여행이고 뚜벅이로 변신했다. 3박 4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가능한 한 이름 없는 얼굴로, 여행자보다는 지역의 생활인처럼 최대한 제주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기로 했다. 그런 여행에 딱 맞는 건 뚜벅이였다. 렌터카로 관광지와 맛집을 따라 점을 찍으며 빠르게 이동하는 게 아니라 느릿느릿 시간을 따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여행을 생각했던 건 아니다. 지난 연말에 뭔가 삘을 받고는 먼저 항공편과 숙소를 후다닥 예약했다. 그러곤 깜박 잊고 있다가 봄이 성큼 다가오면서 출발이 눈앞에 왔다는 걸 알았다. 그래, 이번 여행은 그냥 별다른 계획 없이 가보는 거야. 하루 이틀쯤은 캐리어 때문에 렌터카를 이용할까도 했는데 렌터카 대여조건이 무조건 ‘공항 접수, 공항 반납’이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바로 포기. 먼 거리를 이동할 땐 버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웬만하면 두 발을 믿고 걸어보기로 했다.    

  



이름 없는 뚜벅이의 여행은 내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 무엇보다 여행의 의미가 달라졌다. 

그간 여행은 여전히 멋진 장소와 경관을 구경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뭔가 보고 뭔가 남아야 한다는 고정된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제주는, 일단 가면 들러야 할 명소와 맛집 리스트가 수두룩했다. 새로운 볼거리도 계속 생겨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번에도 요즘 ‘머스트 시’라고 하는 아르테 뮤지엄이나 노형 슈퍼마켓과 같은 핫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렇게 숙제하듯 스탬프 찍듯이 여행하는 건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 볼거리 위주의 관광이다. 그 많은 핫플을 모두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번에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나만의 방향과 속도를 즐겼다. 철저히 자신이 여행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건물과 전시가 멋진 뮤지엄이나 갤러리에서 탄성을 올리며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길을 걸으며 시간에 빠져들었다. 3월의 햇살이 포근하게 내리는 고내리 포구 해안을 따라가며 자연이 주는 선물을 몸으로 만끽했다. 청정한 자연 속에 있을 때 우리의 기운이 좋아지는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이틀간은 애월 주변의 올레길 15~16구간을 걸었고, 나머지 이틀간은 서귀포 동쪽 남원의 4~5구간을 걸었다. 해 질 무렵 기다리던 795번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예고 없이 ‘오늘 휴업’이 붙은 식당 앞에서 잠시 멘붕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서 날것의 여행이 시작되고 나만의 이야기가 남는 것 아닌가. 나는 그저 이 생생한 순간 앞에서 삶의 우연과 변화를 받아들이면 된다. 모든 건 계획한 것이 아니라 뜻밖의 상황이고 의외의 결과다. 바로 여행이 주는 놀람과 재미고 변화무쌍한 인생의 즐거움 같은 거 아닐까.     





* 여행지를 집처럼, 공간과 장소를 새롭게 느낀 기회였다.

여행의 대부분이 무계획, 무일정이다 보니 한 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다. 보통 여행을 할 때 우리 부부는 가능하면 2박 이상, 한 곳의 숙소를 연달아 이용하려고 한다. 오후 늦게나 저녁에 숙소에 들렀다가 다음 날 오전에 나오면 사실 저녁 먹고 잠자는 게 거의 전부다. 여행보다는 숙박에 가깝고 낯선 여행지, 새로운 장소가 주는 매력을 미처 느낄 수 없다.      


이번 여행은 동선이 정말 단순했다. 숙소, 길, 그리고 식당(아니면 카페)이었다. ‘자고, 걷고, 먹거나 마시고’인 셈이다. 오전에 걷고 낮 12시 전에 조금 일찍 점심을 먹은 후 카페에 들렀다 숙소에 돌아오면 3시 무렵이었다. 애월의 보헤미안풍 숙소는 그림 같은 바다 뷰가 보이는 통창이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했다. 창을 닫으면 바깥의 소음과 완벽히 차단된 채 고요와 정적만이 흘렀다. 오래 살아 어느새 내게 딱 맞는 집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흔들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다 깜박 잠이 들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대낮에 잠시 꿈같은 단잠에 빠져든 건 난생처음이었다. 눈을 떠보니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었다. 창밖으로 바다의 물결은 여전히 잔잔하게 일렁거리고 차들이 하나 둘 해안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평화로움이 머문, 한 폭의 수채화 속 풍경이다. 공간이 주는 위로와 휴식이 어떤 건지 절절하게 느낀 여행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뚜벅이 여행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MZ세대의 자소서, 중년의 자소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