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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Sep 25. 2022

남자가 수다에 눈뜨면 생기는 일

지난주에 아내를 따라 서대문의 한 도서관에 갔다. 독서아카데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문요한 님이 강의하는 자리였다. ‘오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란 주제로 총 5회에 걸친 강의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아주 인상 깊은 얘기를 들었다. ‘나이 들어도 활력 있는 사람으로 살려면 난도가 약간 높은 여가활동을 하라’는 권유였다. 85세 이상 고령자 중 45%는 치매로 고생하는데, 건강하게 사는 ‘슈퍼 에이저’들을 조사해보니 ‘오티움’이라고 부를 만한 여가 활동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한다.    

(* 문요한의 <오티움>(2020)은 '여가'를 뜻하는 라틴어인 '오티움'을 '나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 여가'의 의미로 사용한다)


아내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나누려는 사람이다. 나는 처음에 운전기사로 도서관 앞에 갔다가 마지막 두 번의 강의를 함께 듣게 됐다. 진지하게 듣는 수강생들 사이에는 그녀의 절친들도 있었다. 처음 내가 참석한 날 강의가 끝나고 절친 3총사들과 함께 저녁을 하고 차까지 마시게 됐다. 헤어질 때까지 4시간 여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다 고수들의 경지가 어떤 건지 아주 잠깐 체험한 맛보기 장이었다.      


사실은 그녀들의 레전드 급 수다의 밤을 알고 있다. 점심이나 오후에 시작한 자리는 밤늦게야 끝나는 게 보통이다. 언젠가 절친을 만나러 간 아내가 새벽까지 귀가하지 않아 걱정된 내가 전화를 해 “무슨 일이 있느냐?"고 하기가 무섭게 이어진 그녀의 답은 "아직 얘기가 안 끝났어요"였다. 단호한 그 대답에 놀란 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다리다 설핏 잠이 들었다 깨보니 아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 그녀의 기분을 살피며 몇 시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4시 반이라고 했다. 그래서 혹시 얘기하다 다툰 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절친들과 왜 싸워요? 얘기 나누기도 바쁜데"라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녀들의 대화가 얼마나 열띠게 이어지는지 알지 못했고 아내는 내 걱정스러운 질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이후 절친들에게 내 걱정을 전하자 모두 빵^^ 터졌다고 한다.


몇 년 전 그날 새벽의 의아함은 이번에 내가 그녀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차담까지 하면서 풀렸다. 그녀들의 수다는 정말이지 끝없이 이어졌고, 절친들은 그날의 내 질문(혹시 싸웠어요?)을 다시 언급하며 함께 웃었다. 그녀들이 조기 귀가하는 날이란 코로나로 늦게까지 문을 여는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때뿐이었다. 도서관의 강의 마지막 날도 맘 편히 뒤풀이하라고 나는 빠졌는데 그날도 아내는 12시가 넘어 들어왔다. 코로나 여파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아내는 대화에 거침이 없고 디테일에 강하다. 식사를 하다가 그녀의 말문이 열리면 이야기 장수의 보따리가 풀리는 장날 같다. 한 가지가 작은 가지를 쳐서 이야기는 2부 3부로 이어지고, 한두 시간 훌쩍 지나는 건 일도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수다는 건강에도 유익하고 삶을 즐겁게 하는 촉매로도 작용한다. 수다 속에는 마음속에 응어리졌다 풀어져 나온 것들이 있어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자신과 상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위로의 효과도 크다. 때로 쓸만한 정보를 나누면서 뭔가를 배우기도 한다. 인간의 언어 능력 발달이나 사회성을 키우는 데 수다와 대화처럼 유용한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적절한 수다란 가볍게 시작해서 기분 좋게 끝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담 없는 신변잡기나 농담도 좋고, 가끔은 누군가의 뒷담화도  나쁘지만은 다. 나만의 문제일지 모르나 남자들은 그런 것에 약한 것 같다. 직장생활에 치이고 인간관계에 상처받고 이런저런 갈등에 시달리다 보면 인생은 늘 무겁게 느껴진다. 세상일이란 내 맘대로 되는 경우보다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마련이다. 대개 그런 일로 받은 스트레스는 술이나 담배, 회식 같은 걸로 풀었다. 지금 중년을 사는 다수 직장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나이가 들고 여유 시간이 많아질수록 건강하고 활력 있는 생활이 중요하다. 아내와 그 친구들을 보면 여자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걸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 쓸만한 정보를 알고 있고 그런 좋은 기회와 경험을 함께 나누는데 익숙하다. 아내를 따라다니면 그런 수가 훨씬 잘 보일 것 같다.


내게 ‘오티움’은 무엇일까. 머리를 쓰는 일, 몸을 쓰는 일이 적당히 균형을 맞추면 좋을 것이다. 술은 저알콜이나 무알콜 맥주로 갈아타고 적당한 운동을 찾아보면서, 이제 수다의 세계로 서서히 스며들어 보자. 수다 속에 보물이 살짝 숨어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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