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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Sep 12. 2022

무알콜 맥주로 과음하면 생기는 일

오랜만에 제주에서 계 모임을 했다. 3년 만이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매년 한 번씩 열리는 제주에서의 모임이 멈췄다. 8명이 세 달에 한 번꼴로 정모(정기모임)를 한다. 어느덧 18년 전인 2004년 우리가 30대와 40대 한창이던 시절에 제주에서 시작한 모임이라 제주는 ‘성지’라 불린다. 모임의 좌장 또한 토박이 제주도민으로 나이로나 인품으로나 큰 형님이다.


세월이 20여 년 가까이 흐르다 보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절반 정도의 회원이 이제 일선에서 퇴직한 후 자유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특히나 달라진 건 건강과 체력이다. 한때는 왕성한 주력(酒歷)과 전투정신으로 연일 계속되는 야간 비즈니스(음주가무)도 두렵지 않은 시절이 있었으나, 그것도 모두 옛말이 됐다. 그래도 각자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대략 세 가지 길이 아닌가 싶다.  

   

먼저 오리지널을 사수하는 정통파다. 여전히 소주나 소맥을 즐긴다. 소주도 빨간 라벨이 강렬한 원조를 선호한다. 체력과 에너지, 지구력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수정주의 순응파다. 와인이나 막걸리 같은 순한 술로 주류(酒類)의 길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는 다수의 중장년층이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길이 아닐까.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제3의 노선을 가는 부류다. 술은 즐기되(?) 알콜이 없는 술을 마시는 것이다. 무알콜 맥주, 저알콜 맥주 같은 것이다. 이미 상당수 마니아들이 있는 걸 알았다. 환자나 임산부, 차를 운전해야 하는 사람 등등.     


우리 모임에서 제3의 길을 선도적으로 개척한 회원은 놀라운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무알콜 맥주를 마시고 술기운이 올라 저녁 자리를 주도한다. 오리지널 정통파도 기세가 꺾일 정도다. 우리 모임 8명 중에 제3의 길에 들어선 회원이 거의 절반에 가까워졌다. 새로 생긴 질병이나 기저질환 같은 건강상 문제로 각자 음주를 자제해야 하는 상황. 이번 모임에서 나도 무알콜 대열에 들어섰다. 회원이 늘어나자, 아예 회비로 미리 무알콜 맥주를 구입했다.  

    

저녁 자리에서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주류와 비주류가 반반이다. 아니 모두가 주당파라고 해야 할까. 일제히 잔을 채우고 건배를 외친다. 첫 잔을 호기롭게 비운다. 향긋한 맥주가 상큼하게 입안을 적신다. 특유의 이 혀를 감고 입안 구석 양쪽 끝에 톡 쏘듯 퍼진다. 오! 이 맛이군. 잔을 채운 무알콜 맥주는 진짜 맥주와 똑같다. 색깔과 향기, 거품과 맛이 그대로다. 뭔가 하나가 빠졌지만, 눈치채지 못한다. 뇌가 속는 것이다.      


두 잔째 비우자 눈꺼풀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다. 앞에 있는 사람과 배경이 조금 흐려진다. 목도 어깨도 풀려가자, 주변이 약간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상대의 말을 끊고 나도 말을 하고 싶어 진다. 어느새 잽싸게, 말 틈 사이로 내가 끼어들고 있다.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높아지기 시작한다. 원샷!! 바닥까지 비우는 거야. 예전의 그 구호가 저절로 나온다. 세상이 갑자기 즐거워진다. 아, 한잔 먹고 취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오랜만에 기분이 하늘을 나는 듯하다.      


도두동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인 중산간 쪽으로 이동했다. 차로 1시간을 가야 하는 밤길이었다. 좋은 점 한 가지는 대리 운전기사가 필요 없다는 것. 돈과 시간이 절약되니 꿀잼이다. 차 안에서 콧노래가 흥얼흥얼 나왔다. 예전에 한잔 먹고 코스처럼 노래방에 들렀던 시절이 있었지. 큰 형님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자, 순식간에 차 안이 노래방으로 바뀌었다.


아쉬움이 남았는지 숙소에 도착해서 2차가 이어졌다. 남은 무알콜 맥주도 다시 테이블에 올랐다. 남자들의 수다가 쏟아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또 노래가 나왔다. 어느덧 11시가 넘은 밤이었다. 누군가 만류하고 제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겨우 술자리가 파했다.    

  

그렇게 제주 2박을 보냈다. 이틀을 연달아 분위기 업 속에서 과음했지만, 다행히 숙취가 없어 좋았다. 화장실을 들락거릴 이유가 없었다. 다만 과식은 경계해야 한다. 다음날 속이 불편하다면 그건 과음이 아니라 과식 탓이 클 것이다.


뭐든 적당한 게 좋은 나이, 알콜이 없어도 행복한 세상은 여전히 계속된다.      



뇌를 속이기 딱 좋은 무알콜 맥주, 예전에 와인용으로 쓰려고 산 고블렛 잔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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