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May 29. 2022

학생들을 짝사랑하겠다는 이상한 교수

- 고객 지향 서비스 마인드에 관한 생각

20년쯤 전 영국에서 석사 과정 공부를 하던 때였다.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3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영어의 본고장에서 생전 처음 받는 원어민 수업 아닌가. 버벅대는 영어로 토론 수업에 참여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주임교수인 Oliver는 나름 그 분야에 이름이 있는 중진 교수였다. 진지하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상대를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같이 머나먼 변방에서 온 나이 든 학생에게도 관심과 친절함이 느껴졌다. 기회가 있을 때면 학교생활에 관한 것들을 자상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다행히(?) 수업 중에 바로 돌직구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약간의 배려거나 진도 관리 차원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어가 잘 안 되는 학생이 끼어들면 토론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건 뻔하니까.     


그가 쓰던 말투 중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게 있다. “Many Thanks, Indeed!!” 그때까지 영어 공부하면서 ‘땡큐 베리 머치’는 들어봤어도 ‘매니 땡스’는 사실 처음 들었다. ‘대단히 고맙다’ 정도로 들리는데, 끝에 '진짜, 정말로'가 덧붙는다. 처음엔 조금 오버성 느낌이 났다. 근데 '영국의 젠틀맨'이 매번 그러니 점차 기분이 좋아졌다. 실제론 거의 습관적으로 입에 붙은 강조의 말이었다. 상대에게 최대한 친절한 반응과 배려를 보내는 그들 나름의 방식 같았다. 약간은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말이다. 그 말은 뇌리에 깊이 남았다. 귀국 후 나중에 이메일을 사용할 때 한참 동안 즐겨 써먹었다. 본문 끝의 내 이름 다음 문구는 이랬다. ‘오늘도 즐겁게, Many Thanks Indeed!!’     


학교 수업은 대개 에세이로 평가했다. 에세이 작성 주제로 교수가 10개 정도의 질의문을 제시하면 각자 맘에 드는 1가지를 선택해서 답변하는 형식이었다. 영국 문화정책에 있어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은 여전히 유효한가? - 이런 식이었다. 제출한 에세이는 교수의 평가를 거쳐 학생들에게 반환되었다. (당시는 이메일이 일반화되기 전이라 인쇄본을 출력해 학과 사무실에 제출했다. 지금은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이다). 돌려받은 에세이에는 점수와 함께 교수의 꼼꼼한 코멘트가 별도의 종이에 덧붙여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논점이 잘 정리되었다, 주장과 논거가 약하다... 등등. 과목이 달라도 제출하는 에세이마다 교수의 코멘트가 쓰여 있었다. 맨날 빨간 펜으로 그어져 있는 시험지와 점수만 받아본 내겐 사뭇 놀랍고 신선했다. 기분 좋은 '컬처 쇼크'랄까. 자신의 과제를 밀착 마크하는 교수의 손길을 학생이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교수는 자신의 능력과 역할 범위를 그 코멘트로 보여주고 있었다. 코멘트에는 교수의 서비스 정신과 고객 사랑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대의 입장을 매 순간 헤아려 일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살면서 그런 자세와 태도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3가지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와 나, 그리고 관계와 소통이라는 측면이다.     


1)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 알고 싶은 것을 우선시한다. 고객의 필요와 욕구, 수요와 감정을 헤아리고 그에 부응하는 것이다. 자소서를 쓰거나 채용심사의 면접에서도 마찬가지. 선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관찰자의 눈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2) 다음으론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를 고민한다. 바로 나의 역할과 책임이다. 업무적으로 어떤 일을 맡고 있다면 자리와 대우에 걸맞은 의무와 소임을 다하는 건 기본이다. 해야 할 일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실천은 필수다. 물론 무조건 잘해 준다고 좋은 건 아니다. 상대가 정확히 원하는 것을 읽고, 내 능력과 위치에서 성심성의껏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      


3) 결론적으론 수평적 관계와 대등한 위치 설정이 필요하다. 서로를 배려한다고 한 쪽이 '슈퍼 갑'이어서는 곤란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갑을 관계가 있다. 사회생활, 조직 생활 자체가 원천적으로 모든 구성원의 기계적 평등을 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과 위계 속에서 각자의 역할에 맞는 건강하고 균형적인 관계는 꼭 필요하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되 나 또한 그런 관계 속에서 다가가야 한다. 그 속에서 교류와 소통을 활성화하는 것이 좋다.    




30년 이상 공무원으로 살았다. ‘공무원스럽다’는 말을 경계했고, 늘 조심해왔다. 혹시나 판에 박히고 목에 힘주며 변화를 거부하는 공무원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곤 했다. 지금도 종종 고객 중심의 서비스 마인드를 생각한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되새긴다. ‘학생이 고객이고 왕이다. 그들을 짝사랑하라.’ 언젠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갑자기 교실에 실소가 터진다. 아직 우리네 사제관계란 조금 복잡한 모양이다. 내 접근방식이 뜬금없을 수도 있고.      


어쨌든 방법은 다양하고, 계속 시도해야 한다. 학생들의 의견이나 발표는 하나하나 성의껏 코멘트해주려고 한다. 요즘 대학가엔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늘었다. 수업 시간에 대만, 베트남, 중국에서 온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가끔은 20년쯤 전 영국의 교실에 약간은 불안하게 앉아 있는 내가 보인다. 한국말이 어느 정도 되는 학생들에게는 웬만하면 발표를 권유하고, 그들이 말하는 정확한 뜻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평가할 때면 혹시나 교수(평가자)라고 독단적이 될까 해서 합평 방식도 사용한다. 학생들끼리 서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참여도가 높아지고 장점도 많다. 그래도 가끔씩 수업 진행이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면 조바심이 들면서 짜증 섞인 반응이 나오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천천히 다독인다.


"고객을 짝사랑하라. 함께 하기만 해도 고마운 일 아닌가. Many Thanks Indeed!!"






작가의 이전글 자기 말고 옆 사람을 소개하라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