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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Nov 27. 2022

월드컵 시즌에 뜬금없는 올빼미

영화 <올빼미>를 보고 나서

카타르 월드컵이 한창이다.

열혈 축구팬이 아니라도 승부의 세계가 빚어내는 예측불허의 드라마는 연일 흥미진진하다.

더군다나 아시아팀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재미가 최고조다.   

  

근데 뜬금없이 올빼미가 출몰했다.

컴컴한 영화관이다.

11월이면 영화계 비수기인데 생각보다 강한 놈인 것 같다.

영화관이라면 어둠을 지배하는 올빼미에겐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영화 <올빼미>를 봤다.

지난 여름철 <헤어질 결심>, <한산>, <헌트>를 연이어 본 후 오랜만이다.

일단 재밌다.

지루할 틈 없이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박진감 있고 스피디한 전개 속에 강한 몰입감이 놀랍다.

한국영화가 칸이나 아카데미에서 호명되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영화의 실마리는 한 줄의 실록이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 8년 만에 돌아온 후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런데 세자의 시신이 온통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

거기에 ‘유일한 목격자는 맹인 침술사’라고 영화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목격자가 맹인이라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창작과 상상의 이야기가 그럴듯하다.

최강의 드라마와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스토리 부문 우수상(2013) 수상작영화화했다고 한다.

개인 소감으론 중반 이후 독살의 배후가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면서 극의 개연성이 다소 아쉽게 느껴졌다.

이마저도 빠른 사건 전개와 숨 쉴 새 없는 장면 전환으로 관객이 딴생각을 못하게 붙잡는다.       


특히 다양한 인물군의 충돌과 갈등이 한 편의 드라마로 잘 버무려졌다.

극한직업을 연상하게 하는 광기에 사로잡힌 왕 인조,

병약하지만 인간적인 개혁가인 소현세자,

병든 동생을 살려야 하는 현실 속에서 섬뜩한 진실을 목격한 후 고뇌하는 맹인 경수.    


연출력과 연기 또한 일품이다.

맹인 침술사로 분한 류준열은 초점 없는 눈빛과 깊이있는 표정으로 진한 흡인력을 보여준다.

난생처음 왕이 된 유해진은 - 일부의 걱정(?)을 훌쩍 넘어 - 명불허전 절정의 연기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세자와 최대감, 어의 등 영화를 빛낸 조연들의 연기도 긴장감 있게 잘 어우러졌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엔 17세기 조선시대 배경의 영화라 좀 따분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21세기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명청 교체기 이후 혼란의 시대, 치열한 당쟁 속에서 군신들은 눈앞의 이해관계를 좇아 권력의 암투를 벌인다.

사람들은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고, 불빛 아래 부나방처럼 이합집산한다.

오늘날의 우리 자신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 시대 오히려 진실을 지키는 건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맹인 침술사가 말하는 진실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빛난다.    

  



올빼미, 하면 사실 엉뚱한 생각이 난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유격 훈련장에서 이름이 아닌 ‘올빼미’로 불리는 걸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987년 무렵 경북 영천에서 나는 '928번 올빼미'였다.

'독수리' 같은 교관과 조교들 앞에서 훈련병인 '올빼미'는 사실 서툴고 어리숙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도처에 서식하는 진짜 올빼미는 야행성 날짐승으로 사나운 포식자다.

뛰어난 시각과 청력, 날카로운 발톱으로 야생동물을 위협하는 정찰과 사냥계의 베테랑이다.

유격장의 올빼미도 사실은 그런 올빼미의 생태와 능력을 본받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야간 전투의 승리자가 되겠다'는 모토로.


앞을 보지 못하는 침술사는 힘없는 약자에 속한다.

문득, 아직 올빼미가 되지 못한 유격장의 미숙한 훈련병도 떠오른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 진실을 지키려는 그들의 눈빛은 어디선가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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