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Mar 30. 2023

저는 꿈을 이뤘습니다. 당신도 행복을 찾으세요.

- 이상한 한의사의 기묘한 처방

이상한 한의사 얘기를 들었다. 괴짜라고도 했다. 사람마다 고유한 파장을 가지는데 그 한의사는 만나는 사람이 내는 파장을 통해 내면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돼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가 쓴 책을 읽고 논산까지 가서 한의사를 만나고 온 아내의 말에 나는 뭔가 특이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사실 난 영적인 세계나 판타지 같은 말들은 책이나 영화 작품에서나 좋아했지, 현실에서는 그다지 관심 있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세상과는 동떨어진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도 있지 않던가.


아내와 함께 찾은 논산의 한의원은 흡사 여행지 같았다. 전날 한옥마을에서 1박을 하고 들른 데다, 주변이 낮은 산과 들판이 펼쳐진 한적한 시골이어선지 마치 아주 오랜만에 고향마을을 찾아온 기분마저 들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봄날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는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 시원한 통창 밖으로 보였다.




넓은 거실 같은 진료실에서 한의사는 환자가 아니라 손님을 맞는 것 같았다. 소박한 생활한복 차림에 미소 가득한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천천히 물을 데우고 차를 따라준다. 사찰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던 때, 주지스님과 차담을 갖는 시간과 퍽 비슷한 분위기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이야기가 오간다. 특별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한의사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저는 꿈을 이뤘습니다.”

약간의 호기심과 경계심을 갖고 처음 그를 대했는데, 마음 어느 한쪽이 누그러지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조금 안심이 됐다. 이렇게 자신 있게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바라던 의사가 되었어도 자신의 삶이 즐겁지 않은 직업적인 의사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아파서 찾아온 환자는 더 힘들어진다. 그런 의사는 십중팔구 친절이나 배려를 모르기 때문이다.    


행복한 의사 앞이라 환자의 말문이 저절로 열린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을 많이 한 것 같다. 나는 직장 생활 36년을 마치고 이제 자유인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고 했다. 긴 출퇴근 생활을 마치는 데도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무척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오랜 직장생활은 나를 번아웃 상태로 몰아갔다. 카페에 앉으면 자꾸 ASMR에만 끌렸다.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평화로운 자연을 느껴야 마음이 안정됐다.


몇 달 전부터는 '출퇴근 인생' 졸업 후 자유인으로 펼쳐질 앞날을 그리는 것이 나를 위로하곤 했다. 3월이 되자, 매주 하루 고향 근처의 대학에서 강의하는 게 가장 큰일이 됐다. 평소엔 강의 준비를 하고, 강의가 끝나면 노모를 찾는다. 바쁜 직장 생활을 핑계로 뜸했던 노모를 자주 뵐 수 있는 것도 여러모로 위안이 다. 이제부터 나를 중심으로 시계가 돌아가는 인생을 살아야겠다, 고 다짐하는 날들이다.  

    



“선생님 안에 소년이 있어요.”

한의사가 무심한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했다.

오, 정말요? 다행이군요. 나는 속으로 나지막이 되뇌었다.

영혼을 갈아 넣다시피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친 후에도 내게 소년의 감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람 고유의 파장을 통해 내면을 읽는다던데, 지금 그 말은 사실인 걸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이제 진짜 여행을 떠날 때입니다. 어디로 여행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는 법이지요. 인생 1막이 끝나면 2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마인드로 살아야 하거든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히말라야로 떠나세요. 설산이 보이는 조그만 도시에서 한 달쯤 머무는 걸 추천합니다. 거기서 진짜 자신을 만나세요.”

달변은 아니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처방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장 떠나기 어렵다면 가까운 제주 바다도 좋지요. 거침없고 광활한 애월의 바다보다는, 엄마의 자궁 같은 안온함을 느끼게 하는 함덕 바다로 가보세요. 하얀 모래가 투명한 물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찬찬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좋거든요.”     


그 순간 난 갑자기 영화 <반지의 제왕>이 떠올랐다. 한편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순식간에 설렘이 담긴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게 반짝이는 절대반지는 없어도, 꼭 해야 할 인생의 여정이 기다리는 것 같았다. 기묘한 처방이었지만 나는 마법사 간달프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보드라운 구름 위에 올라탄 느낌이랄까. 현실인지 영화 속 판타지인지 따질 필요는 없었다.




2시간 여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어둑한 황토방에 들어가서 따뜻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밖에선 티베트 풍의 명상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한의사는 발을 잡고 기도한 후 침을 놓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내 몸이 나른해졌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아늑한 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 집을 나섰다. 푸른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넓은 마당을 천천히 걸어서 따스한 볕을 만났다. 여기저기 봄 꽃이 막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 마음은 어느새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있었다. 이제 나만의 진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봄 볕이 따사롭게 내리는 논산 사포리의 한의원 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을 영화처럼 사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