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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이타임 Mar 13. 2021

일인칭 똥손 시점

"푸하하하핫!!"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게시판에 걸려있던 내 그림을 보고 미친 듯이 웃었다. '아니, 내 그림이 그렇게 웃긴가?' 그제야 다른 친구들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난 모든 사람을 졸라맨 캐릭터로 그리는 아이였고 확실히 내 그림이 제일 못나보였다. '하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려있을게 뭐람.' 그림이 걸린 위치 탓이라도 해야 마음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림 그리기엔 영 소질이 없다. 일명 '똥손'이다.


대학에서도 미술 수업을 들어야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고 마음먹었지만 정말 열심히 하면 학점이 C-, 대충 하면 C+였다. 누군가는 미술로 마음을 치유한다던데 나는 아픔만 얻어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빨리 완성하고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의욕이라곤 일도 없던 미술수업에서 터닝포인트가 된 순간이 있었다. 먹물로 원숭이를 그리는 시간이었는데 어김없이 '최대한 빠르게!'라는 신조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가장 먼저 작품을 제출하니 교수님은 말없이 내 그림을 칠판에 전시했다. 이내 폭소가 터졌다.

"저게 뭐야! 정말 웃기게 그렸어."

"푸하학, 아 나 진짜 웃겨!!"

내 그림에 대한 웃음소리는 익숙했고 심리적 타격감도 없었다. 차라리 즐거움이라도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은 친구들의 폭소를 가라앉히는 품평을 남겼다.

"대충 그린 것 같긴 한데 느낌 있지 않아? 원숭이가 어린 왕자를 닮았는데?"

꿈보다 해몽이고 그림보단 품평일까? 느낌 있다니. 어린왕자가 보인다니. 죽어가던 의욕이 심폐소생술을 받아 살아났다. 그 품평이 계기가 되어 주어진 시간 동안은 온전히 그려내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똥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C학점도 그대로였으나 마음은 즐거웠다.

당시 그렸던 원숭이 그림! 정말.. 그림보단 품평이다.

몇 년이 지나 미술수업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 열심히 집중하는 아이들 모습이 예쁘다. 똥손의 시점으로 바라보니 대충 도화지를 끄적이는 아이에게도 유독 눈이 간다.

"그냥, 선생님이 대신 그려주면 안 돼요?"

"선생님보다 네가 훨~~씬 더 잘 그릴걸?"


"거봐! 네가 훨씬 잘 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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