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렇다면 나머지들은? 나머지 나약한 인간들, 강력한 자들이 참아 낸 것을 참아 낼 수 없었던 그자들은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이냐?”
영화 <곡성>의 결말부에서, 눈앞의 무명(천우희)과 그녀가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일광(황정민) 사이에서 갈등하던 종구(곽도원)은 끝내 무명의 손을 놓고 참극의 현장으로 뛰어간다. 이것은 선 혹은 신을 의심하고 불신한 대가일까?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모든 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처한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인물들은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이, 믿음은커녕 의심을 부추기기만 하는 상황 속에서, 빵 혹은 기적 없이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당장의 시련을 묵묵히 감내할 수 있을까. 영화가 범인들이 치러야 하는 불신의 대가를 워낙 무참하게 그려낸 탓에,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라 그러지 못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안정을 주겠다는 대심문관의 주장에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반/대심문관에게서는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사실은 여전히 믿고 싶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15세기 만에 돌아온 예수 앞에서 그는 가톨릭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혼자서 열변을 토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고해성사 같기도 혹은 그러게 왜 제때 나타나서 모두를 구원해주지 않았느냐는 투정같이도 보인다. 소설 그 어디에도 대심문관이 울먹거린다는 묘사는 없지만, 읽는 내내 코를 훌쩍이고 눈물을 글썽이는 아흔의 노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럼, 끈적이는 이파리는, 소중한 무덤들은, 푸른 하늘은, 사랑하는 여인은 어떻게 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거야, 어떻게 이런 것들을 사랑할 거야?” 알료샤는 괴로워하며 소리쳤다. “가슴과 머릿속에 그런 지옥을 간직한 채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아니, 형은 정확히 그들에게 합류하러 가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형은 자살을 할 거야, 견뎌 내지 못할 거라고!”
이 뭔 개소리야!가 절로 나오는 이반의 모놀로그가 끝난 뒤 알료샤의 리액션은 뭐랄까, 도대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 수 있을까 싶었다. 나와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는 이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 속의 연약함을 알아채고 상대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 올 한 해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읽으려 애썼는데, 결국 튜닝의 끝은 순정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알료샤” 하고 이반이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말로 끈적이는 이파리들을 사랑할 가치가 있다면, 오직 너를 추억하면서만 그것들을 사랑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