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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kkuu Apr 12. 2016

봄나물의 기억

봄나물의 기억



애기 에디터였을 때다. 긴 호흡의 요리 화보를 배당 받았다. 주제는 봄나물. 어떤 칼럼이든 배당을 받고 나면 바짝 긴장하던 때였지만, 유독 봄나물 요리 화보는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봄나물은 모든 매체에서 봄이 되면 다루는 고정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기자가 좋은 구성, 좋은 비주얼을 만들어 내는지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자 가려내는 리트머스 종이’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일을 시작하고 내게 던져진 거의 최초의 대형 화보이기도 했다. '잘해야 하는데, 잘해야 하는데' 하며 스스로에게 얼마나 주문을 걸었던지, 오죽하면 당시에 봄나물 화보 촬영 현장이 계속 꿈속에 등장하기도 했을까. 꿈 속 촬영장에서는 매번 다른 이유로 좋지 않은 사건들이 터져 나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악몽은 배당을 받고 촬영을 끝내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더랬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다.


요리는 용인에 계신 박선생님이 맡아주셨다. 용인 중심에서 벗어난 시골, 작은 산 중턱에 자리한 박선생님의 작업실 겸 집에서 촬영을 했다. 근처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고, 선생님의 집 뒤에는 온갖 허브와 채소를 키우는 밭이 널찍이 자리해 있었다. 산은 텃밭과 그대로 이어져 산나물도 바로 캐먹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박선생님 댁에서 촬영하는 걸 좋아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고향의 기운을 흠뻑 느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일하는 중간 중간 고개를 돌려보면 왠지 엄마 집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곳은 언제나 햇빛이 풍성했고, 텃밭의 식물은 활기를 띄우며 자라고 있었다. 금방 뽑아 먹어도 될 만큼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대지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자연의 멋과 맛을 좋아하는 박선생님의 밥상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멋 부리지 않고 정직한 밥상. 그렇다고 절대 촌스럽지 않으며 정갈하고 예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 더없이 예쁜 박선생님의 테이블



부담감이 대략 쌀 두 가마니쯤 되는 화보 촬영을 끝내고 난 뒤, 우리는 촬영용으로 썼던 재료들을 모아 새롭게 상을 차렸다. 메뉴는 '봄나물 샤브샤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뭐긴, 말 그대로 샤브샤브지!



메인 재료는 온갖 봄나물이었다. 특히 원추리를 가득 담았다. 원추리는 박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풀처럼 생겼고, 다시 보면 풋마늘의 마늘대처럼 생기기도 했는데, 맛은 조금 씁쓸하면서 특유의 흙 향이 가득했다. 익히면 조금 더 단맛이 났다. "샤브샤브의 육수는 된장으로 했어요. 다시마랑 무로 우린 육수에 된장을 풀어냈죠." 요리는 그게 끝이었다. 넓은 전골냄비에 육수를 담아 팔팔 끓이고, 그 안에는 얇게 썬 대패 삼겹살과 원하는 봄나물을 종류별로 넣어 데쳐 먹는 것이었다. 

"와. 선생님. 너무 맛있어요. 고기랑 봄나물을 이렇게 먹으니 또 색다르네요." 된장 육수의 구수함과 봄나물의 쌉싸래함, 고기의 담백함이 삼박자를 고루 이루었다. 입 안에는 가득 봄의 축제가 펼쳐졌고, 창밖엔 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 쬐고 있었다. "역시, 한별씨는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런 음식의 진가를 알아본다니까. 음식은 아무리 잘 만들고, 정성으로 만들어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말짱 도루묵인데. 그런 면에서 한별씨는 요리가 진정으로 빛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주인이야. 시간이 갈수록, 특히 요즘 시대에 그런 주인 만나기 쉽지 않지. 암, 그렇고말고."


사실 그날의 촬영이 어떻게 끝났는지, 결과물이 좋았는지는 나빴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신 그날의 향기와 박선생님의 안경 너머 눈웃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봄나물은 진한 흙의 기운을 실어다 메말랐던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고, 이런저런 부담감으로 지쳐있던 나를 다시 설레게 만들었다. 내안의 떨림을 초조한 것이 아닌 경쾌한 것으로 바꿔주었다. 텃밭에, 산 능선에 내리쬐던 쨍쨍한 햇볕도 기억한다. 그것은 긴장되고 얼어있던 마음을 사르르 녹여주는 것이었다.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날의 기분은 분명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더없이 황홀한 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게 휴식 같았던 봄 산, 한 움큼 더 자라게 해준 봄의 시간.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어림잡아 3~4년이 지난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정신없이 바빴고, 계절이 언제 오고 갔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살았다. 그런 중에도 불쑥불쑥 그날의 맛과 기억은 나를 찾아왔다. 특히 이맘때, 여기저기서 봄나물 소식을 알려올 때쯤에는 당시 박선생님과 함께했던 봄나물 샤브샤브에 대한 기억이 더 선명해진다. 온몸에 퍼지던 구수하던 흙 맛은 아직도 몸 속 구석구석 진하게 박혀있는 것 같다. 그때 흩뿌려졌던 봄의 흙은 몸 속 깊이 들어와 어느새 토양을 이루고, 그때의 봄나물은 한밭뙈기 작은 터를 이뤄 굳건히 자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매해 봄마다 봄나물이 땅을 뚫고 새순을 피우듯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다시 샘솟는 기운을 퍼뜨려 주는 것 같다.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때 느꼈던 생기로운 봄의 맛은 명치 아래 뱃속 깊은 곳에 남아 꾸물꾸물 흙의 기운으로 다시 올라온다. 그리고 근간의 무기력함을 깨뜨리고 다시 나를 싱그럽게 일으켜 세운다. 그게 진짜 봄나물의 위력인가 싶다. 



갓 자란 고사리 새순
강한 향을 띄우고 올라온 봄나물, 명이 잎








                                  사람과 음식 사이, 그 짧고도 영원한 이야기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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