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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kkuu Sep 27. 2016

밤 맛은 가을 맛



후두두둑 가을비가 떨어진다.

덩달아 밤송이도 후후후둑.

경기 가평 어디께, 어릴 적 살던 집 옆에는 깊은 밤나무 숲이 있었다. 

한 차례 비가 지나갔거나 바람이 유난히 거셌던 밤이 지나면 나는 어김없이 엄마 손을 잡고 집 옆 밤나무 숲으로 여행을 떠났다. 검정 봉지 하나, 면장갑 하나면 여행 준비 끝. 

비와 바람으로 한 차례 요동을 치고 난 뒤 밤나무 숲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들리는 것은 엄마와 나의 발자국 소리와 '밤이다!' 하는 외침뿐. 까칠한 밤송이를 두 발로 잡고 요리조리 움직이면 알토란같은 알밤 두 개가 또르르르 굴러 나왔다. 거친 밤송이의 보호 아래 세상의 티끌과 생채기 없이 오롯이 자라난 밤의 표면은 갓난아기의 살처럼 매끈하고 보드라웠다. 


"엄마! 여기 밤 두 개 추가!"


밤 줍기가 얼마나 재미있던지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내내 땅만 보고 다녔다. 

그러다가 벌집을 잘못 건드려 냅다 줄행랑을 칠 때도 있었지만...

꼬깃꼬깃, 한 줌에 쥐고 있던 검정 봉지는 어느새 매끈하게 부풀어 내 작은 품 안에 힘겹게 들어왔다. 그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꽉 찬 밤 봉지를 꼭 끌어안고 집에 돌아가면 엄마는 바로 앉아 생밤을 까 줬다. 첫입에 들어오는 밤물은 달았고, 오도독오도독 하는 소리도 참 좋았다. 그리고 엄마는 수분이 빠진 밤들을 큰 솥에 쪄서 찐 밤으로 내어 주었다. 그러면 나와 내 동생은 담요 속에 들어가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면서 작은 티스푼으로 시나브로 파고 또 파먹었더랬다. 그때만 해도 그것만큼 달콤하고 부드러운 간식이 없었던 것 같다. 찐 밤이 되지 못하고 남은 밤은 냉동실에 들어가 일 년 내내 삼계탕으로, 약밥으로, 밤 빵으로 잊지 않고 등장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와 함께했던 밤 숲에서의 활약을 떠올렸다. 

수십 번의 계절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가을. 어느덧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을 위해 밤을 찌고 있노라니, 어릴 적 뛰놀던 밤나무 숲이 더욱 아련해진다. 

진 밤과 담요의 온기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어느 해 가을밤, 온 가족이 함께 먹던 밤 맛이 내내 가슴에 맴돈다.






 


                                             사람과 음식사이, 그 짧고도 영원한 이야기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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