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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8 수박

수박요정은 어디에

by 식물리에


고등학교부터 자취를 시작한 나로서는 과일은 꽤 사치스러운 먹거리였다. 사치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과일을 싱싱하게 보관할 수 없는 냉장고의 기능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살았던 곳은 독서실을 개조해서 만들었던 고시원이었다. 원룸에 많이 있는 한 칸짜리 작은 냉장고를 들이기에도 매우 좁아 1층에 공유 냉장고를 사용하였는데 냉장고 자체도 오래되었고 각 층 각 방 사람들의 음식물이 가득 담겨 늘 제 기능을 소화하기 버거워 보였다. 그래서 엄마가 양 손 가득 싸오는 반찬과 과일들은 언제나 반 이상 다시 엄마의 손에 들려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과일은 엄마가 가져오는 족족 다 해치웠는데, 바로 수박이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서인지 어떤 범주에서 딱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하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과일이 없어지고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수박을 고를 수 있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지는 모르겠지만 수박이 좋다. 아삭아삭해서 좋고, 달아서 좋고, 씹으면 입 안 가득 채워지는 과즙도 좋다. 요즘에는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잘라 포크로 찍어먹는데, 이렇게 한 입 크기로 자르고 나면 카누모양의 수박 껍질이 남고 거기에는 수박 즙이 흥건하게 고인다. 그러면 수박 알맹이를 먹기 전 입맛을 돋굴 마냥 껍질에 코를 박고 수박 물을 호로록 마신다. 다 마시고 나면 얼른 아삭한 수박을 씹고 싶어 진다.


제철과일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는 냉장고와 주머니를 가지게 된 이후부터는 여름철 나의 냉장고에는 수박이 떨어지질 않는다. 올해는 작정하고 매일 밤 남편과 1/4통씩 먹고 있다. 매일 배부르게 수박을 먹어서 좋은 요즘이지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 4일에 한 번씩 수박을 사면서도 아직도 맛있는 수박을 고르는 법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수박을 잘 고르는 법이 있을까?' 싶은 것이 올해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수박을 두드리는 것도 꼭지를 판별하는 것도 수박 껍질의 줄무늬를 보는 것도 수박의 맛과 아삭함을 보장해주지 않았다(심지어 동네 마트에는 수박을 두드리지 말아달라는 안내문까지 등장하였다). 요즘은 과일의 당도를 선별해서 출하한다고 하지만 과일 맛의 복불복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름 아주 고심해서 수박을 선별해오지만 제비뽑기에 실패한 날은 맹맹한 맛에 씨가 있는 부위가 흐물흐물한 수박이다. 이런 날은 마트 사장님부터 과수원 사장님까지 미워지지만 그래도 나의 수박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맛없는 수박을 먹었으니까 분명 이번에는 맛있는 수박이 걸릴 것이라는 기대감에 오늘도 마트에 간다.



수박요정이 존재한다면 내가 잘해 줄 테니 맛있는 수박만 먹게 해주면 좋겠다.

수박요정아 어서 내게 원하는 걸 말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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