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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Oct 06. 2024

고요한 물결 속의 나 (#6)

소설의 어느 한 칸 #6

부산의 밤은 침묵으로 감싸였지만,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현, 그는 오래된 걸음을 하며 그 불빛 속을 홀로 지우고 있었다. 도로의 가로등은 길게 뻗은 그의 그림자를 땅에 드리웠고, 발걸음이 아스팔트에 닿을 때마다 작은 울림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퍼졌다. 그 소리는 규칙적이었지만, 우현의 마음속에서는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우현은 그제야 자신이 떨고 있음을 느꼈다. 부산의 바람은 온몸을 감싸며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차가움이 마치 무겁고 둔탁했던 감정들을 가볍게 쓸어내는 듯했다. 그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 속에서 마치 머릿속에 얽혀 있던 듯한 실타래는 점차 풀어헤쳐 지는 듯 했다. 이제, 숨겨둔 기억들이 바람에 쓸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이 필요했다.


불빛이 반짝이는 도로 끝, 바다의 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귓가에 와 닿는 그 소리는 부드럽게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파도는 멀리서부터 밀려와 얕은 모래사장에 부딪혀 흩어졌다. 그 소리는 우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무거운 감정에 닿아 그것들을 잠시나마 위로하는 듯했다. 그는 눈을 감고,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의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공기의 짠 내음과 함께 상쾌한 바다의 향이 코를 자극하며 그의 몸을 감쌌다.


눈을 떴을 때, 우현은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다. 하늘 위로 은은하게 흐르는 달빛이 수면 위에 흩어져 반짝였고, 파도는 잔잔하게 밀려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깊은 바다를 향해 머물렀다. 그 푸른 빛의 무한함이 그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마치 그가 안고 있던 모든 감정들을 받아주겠다는 듯 바다는 끝없이 넓고 묵직하게 그를 감쌌다.


그가 멀리 파도에 시선을 고정할 때마다 그날의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바다는 일렁이며 파도를 한 켠씩 떠밀고, 밀리워진 바다의 조각은 우현에게 부서져 기억과 함께 흩어졌다. 기억은 바다처럼 일렁이더니, 어느 순간 그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차가운 모래가 그의 발끝을 감싸며, 그를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해주었다. 머릿속에서 뒤엉키던 생각들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고, 남은 것은 고요함이었다. 우현은 자신을 채운 그 차분함에 몸을 맡겼다.


바다는 말없이 그를 받아주었고, 그곳에서 우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조용해진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그 자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모든 것이 그저 흐릿했다. 일도, 사람도, 꿈도. 우현은 여전히 도전적인 태도로 버텼고, 매 순간 강한 에너지를 짜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엔 피로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상처가 그 피로 위에 덧입혀졌다. 삶은 그가 그렸던 방향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예상치 못한 장애물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현은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발밑의 길은 그에게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단순한 행위였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도시의 가로등이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를 부드럽게 끌고 갔다. 발끝에 닿는 아스팔트의 차가움, 그리고 그 발걸음이 낼 때마다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 모든 것이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우현은 어딘가 자신을 되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도시는 조용했다. 멀리서만 희미하게 자동차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고, 그마저도 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가로등은 도로 위로 쏟아져 내렸고, 상점들의 불빛은 따뜻한 황금빛으로 퍼져 있었다. 그 불빛들이 우현의 지친 눈을 은근하게 감싸며 다독이는 것 같았다. 거리 곳곳에서 느껴지는 부산의 생동감이 묵직한 피로 속에서 조용히 그를 깨우고 있었다.


멀리 바다 쪽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그의 귀에 속삭이듯 스며들었다. 그 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고요하게 부서지며 그를 감싸 안았다. 짭조름한 바다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우현의 코끝을 간질이는 듯 했다. 이게 뭘까. 바다 내음은 기억 속 깊은 곳에서 그리움과 고통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이젠 날카롭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상처는 더 이상 새롭지 않았고, 그저 흐릿하게 남아있는 그림자처럼 그를 짓누를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그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사람도, 그날의 아픔도,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이제는 괜찮았다. 괜찮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리움과 고통이 실처럼 얽혀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알 것이다. 이 상처 역시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워질 것이고, 그 후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남을 거라는 것을.


우현은 바다 앞에 멈춰 섰다. 짙은 밤의 바다는 은은하게 반짝였다. 달빛이 수면 위로 조용히 흐르고, 그 위를 부드럽게 타고 내려가는 파도는 소리 없이 밀려왔다. 물결의 부드러운 출렁임이 그를 마치 속삭이듯 어루만졌다. 차가운 모래가 그의 발 아래 부드럽게 파고들며, 그를 땅에 묶어 주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짠 바다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고, 그 향이 그의 온몸에 스며들었다.


가만히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묻어두었던 질문들이 마음 속에서 조용히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진정으로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질문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그 질문이 오래전부터 그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그는 알았다. 그가 답을 찾을 시간이 오고 있었고,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몫이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는 길을 찾기로.


우현은 바다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제 그 안에서조차 따뜻함을 느꼈다. 파도 소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 소리가 더 이상 외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씩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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