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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Aug 27. 2024

프롤로그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 프롤로그

지역 명문 고등학교 화선여고. 국내 유명 대학에의 진학율이 높은 이 학교의 학생인 손정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아이였다. 독특한 매력으로 4차원 소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녀는 이 날, 수업이 마치는 것을 고대했다. 다른 학생들이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해야 하는 시간, 누구보다 빠르게 학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크로플을 사기 위해.       

 

얼마 전 티비를 돌려보던 정의는 무심코 보기 시작한 영상에 나온 크로플을 보고선 완전히 빠져버렸다. “아, 먹어 보고 싶다. 방송에 나온 곳이면 멀겠지. 서울에 있는 가게겠지.” 유명하고 맛있어 보이는 곳은 왜 죄다 서울에 있나 몰라. 그때였다. 

 

“부산의 명물, ㅇㅇ크로플을 먹으러 오세요.”      

 

벌떡. 정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의를 보고 놀라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정의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계획을 짰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오늘이다. D-Day. 그 이후 담임 선생님과 치밀한 교섭을 해온 것이 어제 성과를 보여 귀가 허가증을 받아냈다. 하지만 어제는 자전거를 가져오지 않았어. 그래서 오늘은 학교 오는 길에 자전거도 챙겨왔다. 귀가허가증의 날짜도 다시 받아냈다.      

 

수업이 끝나자 마자 정의는 전기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나섰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크로플의 바삭하고 달콤한 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크로플을 먹는 이 순간, 나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지도 몰라.” 정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페달을 밟았다. 이 단순한 행위조차 그녀에게는 일상 속에서 발견한 작은 모험이었다. 크로플을 향한 기대감은 정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그녀의 주변을 감싸는 풍경조차 마치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길처럼 느껴졌다.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가던 길을 정의를 흘끗 쳐다본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과 자전거. 별 것 아닌 조합으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곳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어딘가 상상에 깊이 잠긴 듯한 표정, 그리고 전기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이동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고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의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독특한 분위기에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 정의는 그런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마치 바람처럼 그저 흘러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갖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상상은 목적지를 향한 길조차 마치 또 다른 세계로의 여정처럼 만들어 주었다. 정의가 달려간 길의 뒤에는 그녀가 향한 방향을 향해 한길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생기고, 사라졌다. 일상을 멈추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길 끝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어.” 정의는 혼잣말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크고 작은 가능성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어디에서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정의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길가의 나무와 스쳐 지나가는 차들,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조차도 그녀에게는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신호처럼 들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 중 몇몇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렇게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걸까?’ 정의의 표정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신호에 멈춰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정의와 같은 신호에 멈춰 서 있던 운전자들과 다른 탑승객들.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길에 멈춰 선 사람들에게 정의는 같은 방향으로 함께 향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곁에 있지만 곁에 없는, 어디론가 머나 먼 곳으로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신호가 바뀌자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세계와 정의의 세계는 순식간에 나뉘어 졌다. “어어.” 버스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무심결에 내뱉은 것처럼, 차창 너머로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아쉬움을 느낀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었으리라.      

 

“급해.” 바빠. 시간이 아주 여유롭지는 않다. 그래도 정의에게는 멈춰야 할 일이 생긴다. 정의에게 있어서 오늘은 반드시 그 크로플을 먹어야 할 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의는 크로플이 자신의 결정을 가로막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는 정의답게, 그녀의 눈에 들어온 세상에 그녀처럼 겪어간다.     

  

정의는 그저 자신만의 세상 속에, 그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은 평범함 속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내고, 일상 속에서도 모험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에게 그 모험의 목적지는 달콤한 크로플이 기다리고 있는 가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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