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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Aug 28.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1화

정의의 자전거

“자, 여기까지.”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정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이 이런저런 전달사항을 말하는 동안 가방은 미리 챙겨두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뿐이다. 정의는 다이어리를 가방에 마저 대충 쑤셔 넣고 재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자율학습이 시작되려면 아직 5분 남짓 남았지만, 정의는 이미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오늘도 역시, 그녀의 특유의 당당함과 특이한 발상이 빛을 발했다.     

 

"정의야, 드디어 그거 먹으러 가?" “응.”

 

인터넷에서 유명한 크로플 가게. 점심시간에 틀어 놓은 5반의 티브이로 처음 그 크로플을 보고 주말에 가게를 찾았던 정의는 주말에는 가게를 열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했다. 주중에는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여고생에게 이런 영업방침은 절망이다, 아니 도전이다.

 

지난 2주 동안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찾아가 자신이 크로플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드디어 어제, 담임 선생님은 정의에게 귀가 허가증을 발급해 주었다. 정의가 5반에 있는 줄은 모르고,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했다는 학생이 있다는 말만 듣고 덥석 담임직을 수락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담임은 귀가증을 들고 기뻐함에 정신이 없는 정의를 두고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라고 작게 말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맞은편 책상의 선생들도 듣고 동정의 눈빛을 보낸 만큼 정의도 들었을 법한데, 정의의 얼굴에는 선생님을 향한 걱정이나 그런 불안의 징조는 전혀 없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 가볼게요.” “어, 으응.”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그냥 바로 줘 버릴걸.  정의의 선생님, 불운의 5반의 남자, 그는 이렇게 하나를 배웠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도 무언가를 배웠다. 아마, 내년에도 정의의 담임은 그가 될 분위기다.

         


"정의야, 이제 나가?"

교실을 나서려는 정의의 뒤에서 송하윤이 물어봤다. 그녀는 정의의 오랜 친구로, 먹을 것에 대한 정의의 사랑과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에도 같은 반이었던 그녀는 간식으로 싸왔다는 정의의 도시락에서 계란말이를 하나 뺏어 먹었다가 그 이후 3개월 동안 정의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던 적이 있다. 정의가 계란말이를 먹을 때면 하윤은 아직도 잠시 움찔하고 만다.       

 

"응, 크로플은 곧 매진될 텐데, 수학보다 크로플이 더 중요하지!" 손정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정의, 쟤 이과 지망으로 써내지 않았냐?” “응...”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만 정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듣는 기능은 지금 필요 없거든.      

 

"그래도 좋겠다, 자율학습 안 해도 되니까." 한 소녀가 고개를 내밀며 부러워했다.

"난 우리가 1학년 5반 마스코트 덕분에 조금이나마 대리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 옆자리의 수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정의가 빠져나간 교실문을 힐끗 보았다.     


이미 가버린 줄 알았던 정의는 그 말은 들었는지 다시 교실 안으로 몸을 반만 들어와 넣고서 고맙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5반의 친구들은 이 4차원 소녀가 가지는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특이한 발상과 행동, 예기치 못한 농담들로 가득한 그녀의 일상은 반 친구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고, 정의는 1학년 5반의 마스코트처럼 여겨졌다. “못 말려.”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다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정의가 나가고 정의의 일정에 관심을 가지던 학생들은 남은 5반은 자연스레 공부를 미리 준비하는 학생들과, 조금 남은 휴식 시간을 어떻게든 누리려는 아이들로 나뉘었다.

 

정의는 계단을 통해 곧장 1층으로 내려가려다 멈춰 섰다. 지금은 복도가 번잡한 데다, 2층의 다른 교실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자율학습시간까지 10분 밖에 남지 않았기에 매점에 가려는 학생들, 화장실에 가려는 학생들로 복도는 바글바글했다. "이러다 늦겠어." 정의는 혼자 중얼거리며 결정을 내렸다. "3층으로 올라가는 게 낫겠다. 2학년들은 선생님들로부터 전달사항이 많으니까 복도가 덜 복잡할 거야." 그렇게 결심한 정의는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3층에 올라서니, 예상대로 복도는 한산했다. 2학년 교실은 여전히 수업이 끝나지 않았거나, 학생들이 교실 안에서 조용히 전달 사항을 듣고 있었다. 이제 이 복도를 가로질러 가면 학교 건물의 동쪽 방향에 있는 식수대로 보다 빠르게 갈 수 있다.      

 

정의는 복도를 지나면서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란 햇빛이 창문을 통해 따스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창밖에서는 학교 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운동장과 햇빛이 보이는 반대쪽에는 아직 교실에 학생들이 남아있는 3층 복도를 재빨리 지나가는 정의를 의문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에는 육상부 학생들이 트랙 위를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정의는 그들을 잠시 감탄스럽게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해. 저렇게 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아니지! 난 자전거가 있으니까 괜찮아. 자전거는 달리기보다 훨씬 낭만적이야,’ 정의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교실 문 앞에서 선생님과 몇몇 학생들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복도의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러고 있는 동안 내가 먼저 크로플을 사면 되지."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3층 복도를 가로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정의는, 복도 곳곳에 놓인 관엽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식물들은 항상 저 자리에 있었던 건가? 참 이상해, 왜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거지?’ 그녀는 조금 엉뚱하게도 식물의 잎사귀들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급히 시선을 돌렸다.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다다랐을 때, 아래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의는 귀를 기울였다. 1층에 있는 매점에서 학생들이 군것질을 하며 웃고 떠드는 소리였다. 분명 정의는 종례 하자마자 나왔는데, 저 학생들은 어떻게 벌써 매점에 가 있는 거지. ‘매점도 벌써 저렇게 북적이네. 난 크로플 가게로 갈 거야, 매점 음식은 이제 지겨워.’ 평소 매점에서 자주 사 먹는 편이 아니지만, 정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매점에서 군것질하는 학생들을 봤으니, 오늘 먹을 크로플이 더 맛있을 거야.      

 

정의는 마침내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와, 운동장이 보이는 출구 쪽으로 향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둘러보니, 육상부 학생들이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한 명의 선수가 눈에 띄었다. 짧게 묶은 긴 머리에 강인한 체격을 지닌 여학생이 트랙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멋지다. 햇빛을 입고 달리는 것 같아. 어쩜 저렇게 빠를 수 있을까?" 정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운동장 반대편, 1학년 5반이 있던 방향에서 정의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점차 짧아지는 그녀와의 거리만큼 그녀의 얼굴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온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달리는 모습만큼이나 멋져 보였다.

“그나저나 예쁘다아...”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저녁 6시를 넘어가는 태양은 눈부신 노란빛이 드물어지고 그리운 붉은 기운이 서려가고 있었고, 그 기운을 받아가는 저 선수는 더욱 예뻐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정의는 자신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녁 햇살을 튀겨내는 땀을 두른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정의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 크로플! 크로플이 먼저야!"     

 

정의는 식수대를 지나 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이미 몇몇 학생들이 매점에서 간식을 먹으며 자전거를 옆에 세워두고 있었다. 정의는 그들 곁을 지나 자전거에 다가갔다. 운동장을 지나며 들려오는 육상부 학생들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손정의의 시선은 오직 한곳에 집중되었다. 그녀의 자전거, ‘정의의 자전거’가 그곳에 있었다.      

 

‘정의의 자전거’      

 

까만색의 작은 접이식 전기 자전거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전거의 프레임은 마치 깔끔하게 조각된 검은색 보석처럼 빛나고, 표면은 매끈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정의는 마치 소중한 예술품을 대하듯, 자전거를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정의의 자전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작은 기계는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미래에서 온 비밀스러운 물체처럼 느껴졌다.     

 

이 자전거의 크기는 정말로 작고 귀여웠다. 그 작은 바퀴들은 정의가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마다, 마치 그녀와 함께 춤을 추듯 경쾌하게 돌아갔다. 작지만 견고한 바퀴들은 마치 아이들이 만든 모형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손정의에게 이상한 경이감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이 작은 기계가 어떻게 그렇게 부드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걸까?

 

게다가 이 자전거는 접이식이었다. 정의는 몇 번이나 이 자전거를 접고 펼쳐보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접히는 순간, 자전거는 마치 원래 그런 모습이었다는 듯 작고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이 기계는 그녀의 손안에 쏙 들어가 버렸다. 자전거를 자주 타지 않기에 접는다는 기능이 정의에게 크게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해도 자전거라는 탈 것을 접을 수 있다는 것은 정의에게 굉장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기로 움직인다는 점이 그녀에게는 가장 큰 신비였다. 전기 자전거라니! 손정의는 기계나 전자 제품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전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그 힘이 어떻게 작은 자전거를 움직이게 만드는지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자전거를 타고, 전원을 켜기만 하면 이 기계는 마치 자신만의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정의는 조심스럽게 자전거의 핸들을 잡았다. 가죽으로 감싸진 핸들은 그녀의 손에 딱 맞는 느낌이었다. 검은색 핸들바의 차가운 감촉은 묘하게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고, 그 끝에 달린 작은 전원 버튼은 마치 손정의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하는 듯했다. 그 버튼을 누르면 자전거는 생명력을 얻고, 마치 정의와 하나가 된 듯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전기라는 게 정말 대단해." 정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작은 기계가 움직일 수 있는 건 다 전기 덕분이야. 전기라는 게 없었다면, 난 이렇게 멋진 자전거를 탈 수 없었겠지." '잠시, 전기를 향해 감사.' 속으로 작은 감사를 보내고서 그녀는 잠금장치를 풀고 자전거를 천천히 끌어냈다. 자전거는 이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손정의는 자전거를 바라보며 깊은 애정을 느꼈다. 이 검은색의 작은 기계는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세상과 자신을 연결해 주는 특별한 존재였다.

‘이 자전거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크로플 가게도, 그보다 더 먼 곳도.’ 손정의는 자전거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자, 정의의 자전거야. 우리 이제 출발하자!’     

 

‘정의의 자전거.’     

 

‘내 자전거는 정말 멋져. 이렇게 작고, 콤팩트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빠르다니. 이 작고 귀여운 바퀴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진짜 경이로워. 다른 자전거들과 달리, 정의의 자전거는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라이딩을 선사하지. 전기 자전거라는 건 정말 대단한 발명인 것 같아.’ 속으로 하는 말이지만 정의는 자전거에게 자신의 마음이 전달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 거야. 알아줄 거야.' 이렇게 자신이 자전거를 믿고 있으니, 자전거는 오늘의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반드시.      

 

이 세련된 디자인을 보라고. 검은색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그리고 이 접이식 프레임! 얼마나 기능적인데 동시에 예쁜지, 딱 내 스타일이야. 더군다나 이건 전기 자전거야, 내가 힘들 때 배터리만 있으면 언제든지 나를 도와주지. 오늘은 크로플을 사러 가야 하니까, 배터리가 충분해야 해.     

 

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어딜 가든 사람들이 나를 한 번씩 쳐다봐. 그리고 난 그들의 시선을 즐겨. 아주 좋아. 난 내 자전거와 정말 잘 어울리거든. 마치 이 자전거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우리 둘은 정말 완벽한 짝이야. 정의는 조심스럽게 안장에 올라탔다. 한 번 더 자전거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후, 출발 준비를 마쳤다.     

 

‘이제 크로플을 사러 가자, 정의의 자전거야. 우리가 늦기 전에 출발하자고!’     

정의는 자전거의 손잡이를 감아 당겼다. 자그마한 정의의 체구는 무게로 느껴지지도 않는 듯, 검은빛의 자전거는 정의를 태우고 달려 나갔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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