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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Aug 29.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2화

하나, 둘. 조심조심, 하나 둘.


크로플 가게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아마 그럴 걸. 부산의 복잡한 도로를 가로질러야 하고, 특히 유명한 '긴 신호등' 앞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괜찮아. 시간이 좀 있으니까. 정의는 속으로 자전거 속도를 조절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저기 멀리 있는 신호등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신호등은 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야만 신호가 바뀌는 타입이다. 게다가 차선이 너무 많아 길기로 유명한 횡단보도 앞에 있었다. 저 신호가 오늘의 최대 난관일 수도 있겠어. 정의는 속으로 생각하며 자전거의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횡단보도에 다다랐을 때, 정의는 이미 자신이 충분히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옆을 지나치는 자동차들은 정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고 있었다. 좌우로 그리고 앞뒤로 신호가 바뀌고 있었지만 횡단보도에는 신호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버튼을 눌러 횡단보도에 신호를 넣기 위해 신호를 향해 가려던 정의는 길을 멈췄다. 정의가 가려던 방향과 다른 방향의 횡단보도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작은 체구만큼이나 작은 그림자를 곁에 끼고서, 할머니 한 분이 신호등 옆에 서 있었다. 허리가 굽고,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버튼을 눌러야 하는 신호등을 무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한 발짝 뒤에는 할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빨간 보자기로 싸인 짐이 두 덩이, 한눈에 봐도 무겁기 짝이 없어 보이는 메는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저 할머니,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을까? 정의는 잠시 자전거의 속도를 줄이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시간은 6시 15분. 아직 여유가 있다지만 1분 1분씩 확실하게 크로플이 매진될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할머니를 돕게 된다면 할머니가 건너야 하는 저 쪽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다시 이곳에 돌아와 바른 방향으로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하지만... 정의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얼굴에 비친 고독과 두려움이 정의의 마음을 움직였다.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부터 자전거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정의. 할머니의 주변에는 할머니를 도와주는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괜찮아." 정의는 혼잣말을 하며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정의는 신호등 근처에 자전거를 세우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할머니는 놀란 듯 정의를 쳐다봤다. 아, 이 할머니. 요즘의 도심에서 사람으로부터 먼저 도움을 받기란 참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겠지.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겠지. 할머니는 놀란 표정 다음에, 정의와 마주친 눈 속에서 긴장을 풀고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고맙네. 고마워." 할머니는 정의의 손을 꼭 잡았다. 주름이 거친 손에 흙이 아직 조금 묻어 있는 것이, 옆에 놓인 보따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를 가늠케 했다. "여기 계속 서 있었는데, 신호가 안 바뀌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어." 정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신호등의 버튼을 눌렀다. "이 신호등은 버릇이 없어서 눌러줘야 신호가 바뀌어요." "그것 참 고얀 놈이네." 정의는 할머니와 눈을 마주친 채 계속 있다가는 눈가가 촉촉해질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려 건너야 할 방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보행자 신호가 바뀌자, 정의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횡단보도를 함께 건넜다. "할머니, 천천히 걸으세요. 괜찮으니까요." 할머니는 정의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의는 속으로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크로플 가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할머니를 무사히 건네준 뒤 빨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학교에서 막 나온 두 명의 친구가 정의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었다. 유미와 하린이었다. 유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저기, 정의 아니야?"라고 물었다. 하린은 눈을 크게 뜨고 "맞네. 저기서 할머니 도와주고 있네? 역시 특이해. 그런 걸 혼자서 자연스럽게 하다니..."라고 말했다. "난 못할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섭기도 하고." "그것도 그래." 유미는 그 말에 공감하며 "참, 그 애가 참 독특하긴 해. 보통 아이들은 저렇게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말이야. 역시 정의답네."라고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길을 건너는 정의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근데, 크로플 사러 간다고 했었지? 저러다가 크로플 못 사는 거 아냐?" 하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정의가 크로플을 사기 위해 오늘 자습을 빼먹는다는 것은 이미 학년 안에서 유명한 뉴스가 되어 있었다. 유미는 "글쎄, 시간이 애매하긴 하겠다. 하지만 정의는 늘 어떻게든 해내니까, 오늘도 그럴 거야."라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횡단보도의 맞은편, 정의가 건너야 하는 방향의 건너편에서는 한 남자가 정의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 날렵한 턱선, 그리고 깊은 눈빛까지... 그는 서울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감정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늘 어려운 일과 어려운 직업 생활에 지쳐 도망치듯 쉬러 내려온 부산에서, 지금은 잠시 머물고 있는 중이었고, 그는 이 도시의 사람들과 일상 속에서 영감을 얻고 있었다. 남자는 정의의 선행을 보며 마음속 깊은 감동을 느꼈다. "저런 작은 친절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정의를 응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는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만든 양손을 들어 만든 프레임 속에 정의와 할머니를 넣어 보았다. "멋지군. 하지만 어렵겠는걸." 남자는 그 순간, 정의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겼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정의가 할머니를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음 신호에 다시 건너와서 보니, 그의 자전거는 횡단보도 옆에 고요히 세워져 있었다. 세련된 검은색의 작고 콤팩트한 디자인. 정의의 자전거는 정의가 그를 떠나 있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듯이. 

시간을 확인해 보니 몇 분, 겨우 몇 분이었다.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고, 지금 정의에게는 자전거가 있다. 그것도 전기 자전거. "아, 횡단보도는 걸어서 건너야지." 정의가 건너야 하는 횡단보도의 건너편에서 자전거에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정의의 모습을 재밌게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정의는 자전거를 한 손에 잡고, 신호를 눌렀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서 할머니를 모셔다 드린 다른 방향의 횡단보도 건너편을 보니 굽은 등의 할머니가 양손에 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고 계셨다. "할머니, 이제 안전하게 가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정말 고맙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정의의 인사에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정의의 가슴에는 따뜻한 것이 몽글몽글 느껴졌다. 왠지 오늘 먹을 크로플은 참 따뜻한 맛일 것만 같다. 정의는 자전거에 올라 핸들을 당겼다. 아직은 남아 있는 저녁 햇빛이 정의가 가는 길을 향해 길게 길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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