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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Aug 30.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3화

마주치는 것에는 커피가 있다

정의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서도 여전히 그 할머니를 생각하며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고 있었다. 할머니의 고맙다는 인사와 미소가 떠오르면서,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그녀의 가슴속에 따뜻하게 자리 잡았다. “내가 왜 그랬지?” 정의는 자문했다. 학교에서의 정의는 나서서 튀어보이려고 애써 보인 적이 없었다.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와서 그 할머니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럴 필요 없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야. 그래, 그뿐이야.” 지나


부산의 저녁 공기는 이제 천천히 서늘해지기 시작했고, 볼을 스치는 바람에는 서늘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정의는 그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사람들은 종종 길을 잃거나, 횡단보도 앞에서 망설이곤 했다.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있어서일까, 이상하게 정의에게는 그런 장면이 자주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정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안도감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그때의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있었었을지도 몰라." 그녀는 혼자 속삭이며 다시 페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그녀는 어느새 또다시 크로플 가게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급해졌다. “시간이… 얼른 가야 해. 안 그러면 또 크로플이 다 팔려버릴지도 몰라.” 크로플을 떠올릴 때마다 정의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크로플, 화면으로 보았던 크레프에는 달콤한 향기가 가득 느껴지는 것만 같았었다. “다른 애들은 왜 크로플 맛을 모를까?” 같이 크로플 먹으러 가자고 친구들에게 말했을 때의 친구들의 표정은 '굳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만의 비밀로 남겨두는 게 좋겠지. 그래, 그게 좋아." 그녀는 그렇게 납득하며 페달을 더 빠르게 밟았다.


냐옹. 그러던 중, 정의는 정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시선을 길의 곁으로 돌렸고, 지금 있는 넓고 번화한 길에서 눈에 익지 않은 갈림길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아서, 길에 먼지가 깔려 있어 보이는 길. 그런데 주욱 뻗은 길. 이 갈림길의 방향은 지도상으로는 크로플 가게 방향을 향해 있었다. 갈림길에서 정의는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골목길 쪽을 응시했다. 정의는 이렇게 갈림길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병이 있다. “이 길로 가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뭐, 모르지. 어쩌면 더 느릴 수도 있지만… 하지만 재밌을 것 같아. 그래, 이 길로 가보는 거야.”

그녀의 머릿속은 재빨리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 길이 만약 더 빠르다면… 그렇다면 크로플이 매진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음, 그래도 모르지, 길이 험할 수도 있고… 하지만 뭐, 어때? 모험은 항상 재미있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중얼거리면서, 마침내 자전거의 방향을 좁은 골목길로 틀었다.


골목길. 골목길이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은 어쩜 이렇게 멋질까. 걸어서 어딘가로 갈 때 정의는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다가 약속에 늦고는 했다. 친구들과 서면 번화가의 예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던 어느 날에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건물 뒤쪽의 샛길로 돌아와 카페 옆문으로 들어왔을 때, 친구들이 놀라던 표정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정의는 넓은 도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자전거 바퀴는 골목길의 오돌토돌한 바닥을 지나며 부드러운 소음을 내고 있었다. 타닥타닥.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에는 미처 다 깨어지지 못해 모래가 되지 못한 작고 작은 돌조각들이 많다. 그런 작은 돌멩이들이, 드물게 방문한 손님,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린 아가씨의 길에 작고 귀여운 리듬을 뿌려주고 있었다. 조용한 골목의 적막의 화선지에 먹물처럼 지나가던 정의는 속도를 천천히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담으로 둘러쳐진 곳. 이곳은 마치 또 다른 세상 같았다. 담벼락이 높이 둘러쳐진 주택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서 있었다. “이곳은 참 이상해… 저렇게 큰 길이 옆에 있는데, 저 길은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골목길로 들어서기 전의 길에만 해도 쉼없이 지나가는 많은 차들, 차들에서 오르내리는 그리고 걷고 걷고 사라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직 정의에게만 보이는 것처럼 정의가 골목샛길로 사라지는 동안에도 저기 큰 길의 시계는 1초가 아쉽다는 듯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똑같은 길인데도… 아니,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거겠지.” 정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골목을 따라갔다.


골목길은 사람이 둘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정의는 페달을 밟는 속도를 더 낮췄다. 바닥은 울퉁불퉁했고, 자전거의 바퀴는 바닥의 울퉁함에 맞을 때마다 통통 튀기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마주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 길이 진짜 맞는 걸까? 그래도 뭔가… 이쪽이 더 빠를 것 같아. 맞겠지 뭐. 아니면, 뭐.” 자전거와 정의의 오늘의 데이트는 정으의 지난 2주간의 마음씀도 한 몫을 해야 야했고, 담임 선생님의 귀 건강을 소모하며 성사되었지만, 오늘의 정의의 목표가 실패한다면 뭐, 그것도 좋으리라. 지나간 일에 잠겨들지 않는 것이 정의였다. 지금의 정의에게는 당장 가고 있는 크로플 가게 만큼이나 골목길의 이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정의의 발은 어느 골목길에 어울리는 리듬으로 타악, 타악 페달을 밟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 돌벽들이 늘어서 있어서인지 골목길 저 편으로부터 정의를 향해 오던 공기들은 보다 서늘한 편이었다. 정의의 머리카락에 서로 잠시 머물다 가는 제각각의 바람들에는 주택가 특유의 생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저녁을 준비하는 냄새가 담벼락 너머로 은은하게 퍼져 나왔고, 창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TV 소리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곳의 일상을 엿보게 했다. “참 신기해… 이렇게 좁은 공간에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나 꽉 차 있을 줄은.” 내가 사는 곳이 누군가의 삶의 바로 곁이라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골목길이라는 특성상, 그리고 주택이라는 특성은 이렇게 나를 더 보여주고, 솔직해 질 수 있는 일종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도 저 집들 속에서 누군가의 일상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 즐거울거야.” 정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골목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던 중, 오솔오솔하던 골목길이 잠시 굽어지더니 다시 펴진 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였다. 자전거를 탄 남자. 그도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정의는 천천히 속도를 더 줄였다.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설퍼 보였다. 페달을 밟는 다리가 떨리고, 핸들을 잡은 손이 서툴렀다. “저 사람, 자전거 타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런데 왜 이 좁은 골목길을 자전거로 가고 있는 거지?” 정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지켜봤다. 정의의 방금 말을 들은 사람이 없고, 정의의 평소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지적을 할 사람이 없지만 정의 또한 골목길에 자전거를 굳이 타고 들어와 있었다. 


남자가 짧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구나 싶은 거리로부터 남자의 표정에 당황함이 어린 것이 느껴지는 거리까지 가까이 오자, 정의는 직감적으로 자전거를 멈췄다. 좁은 골목길에서 둘 다 자전거를 타고 마주치면 무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어쩌지? 그냥 내가 내려서 걸어가는 게 낫겠어.” 그녀는 서둘러 자전거에서 내려 골목 한쪽으로 자전거를 밀었다. 골목길은 균일한 너비가 아니어서, 오랜만에 먹을 것을 지나치게 먹은 뱀의 배처럼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뱀의 배로부터는 배꼽에서 나온 것처럼 저기 동네 뒤를 따라 산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계단이 있었다. 정의는 뱀의 배부분 같은 곳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어느 새 남자는 정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맞은편에서 정의가 온다는 것을 인지는 했지만 어찌 대처할 방법을 모르는 듯이 자전거에 타고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는 정의가 자전거에서 내려 골목길 한켠으로 비켜서 있는 것을 그제야 보았다. 정의가 서 있는 곳을 막 지나치려는 순간 남자는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는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엔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엿보였다. 

“저기…”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이쪽으로 비켜서 지나갈게요.”라고 말했다.


정의는 그 말을 듣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게 하죠.” 정의는 산으로 향하는 탯줄같은 계단에 앉아 있었다. 계단의 칸은 정의의 무릎에 가까울 만큼이나 가팔라 의자처럼 앉기에 적절한 높이였다. 싱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표정이 없는 것 같기도 한 정의의 표정을 살피며 남자는 정의의 앞을 지나쳤다. 짧게 자른 머리, 그리 길지 않은 앞머리가 바람에 살짝 흩날렸다. 눈매는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은 확신과 고요함이 공존하는 느낌을 주었다. 마치 세상 속에 있지만,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자의 옷은 단정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었고, 걸음걸이는 느리지만 확고했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여고생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따뜻하고 묵직했다. 해가 지기 전의 마지막만 같은 빛이 남자의 옅은 미소를 비추며 그의 얼굴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그 미소가 자신에게 주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그녀의 앞을 지나쳐 가면서도 눈길을 살짝 주었다. 그 눈빛 속에는 미묘한 감사의 마음과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마치 그 눈빛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려는 듯. 그리고 남자는 그녀를 지나쳐, 천천히 골목 저편으로 향했다. 




골목길이 굽이로 남자가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 남자는 갑자기 멈춰섰다. 그가 멈춰 서자 정의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뭐지? 뭘 하려는 걸까?” 그녀는 속으로 궁금해하며 그를 지켜봤다. 남자는 자전거를 세워 두고 정의를 향해 걸어왔다. 그를 얼굴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내려 향하는 햇빛에 정의는 남자의 단정한 얼굴이 더 따스하게 잘 보였다. 정의의 앞에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쿠폰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 카페에 한 번 들러보세요. 커피가 맛있어요.”


정의는 그 쿠폰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이런 걸 주는 거지? 혹시 나한테 반했나? 난 크로플이 먹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저기 어디더라, 내리는 커피가 맛있는 곳이 어디 있었는데, 어디였지. 내리는 커피라면 드립커피라는 것이었지? 기계로 내려서 위에 노란 빛이 나는 거품이 있는 그건 뭐였지. 맛있어 보였는데. 무슨 맛일까. 

순간 당황해 버린 정의는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잠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질 했다. 냐옹. 뒤편인가 어딘가에서 들려 고양이 소리에 정의는 정신을 차렸다. 남자는 아직 정의의 앞에 있었고, 그의 손에는 쿠폰이 들려 있었다. '아 아직 안 받았구나.' “고맙습니다.” 그녀는 짧게 답하며, 쿠폰을 받았다. 쿠폰의 반대 끝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은 쿠폰을 받아드는 정의의 손과 닿지 못할 만큼의 간격을 두고 있었지만, 정의는 잠시 두근거림을 손가락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두근, 두근. "고맙습니다." "꼭 와봐요." 고맙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정의는 받아든 쿠폰을 향해 시선을 떨어뜨렸고, 남자는 그런 정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골목길 저편,  자신의 자전거를 세워 둔 쪽으로 향했다. 그는 어설픈 모습으로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의 반대편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정의는 남자가 사라진 후에도 잠시 쿠폰을 들여다보았다. 카페 쿠폰이라… 이상하네. 나한테 왜 이런 걸 주지? 잠시 생각했지만, 그런 호기심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쿠폰을 자전거 바구니에 넣고 다시 길을 나섰다. 골목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이 골목이 마치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자전거가 천천히 움직였다. 고요한 저녁의 정적 속에서 작은 소리들이 그녀의 감각을 간질였다.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낮은 대화 소리, 창문을 닫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어우러져 이 골목길의 일상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길을 지나갈 때,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로 나타났다. 그녀가 지나갈 때를 맞춰 담벼락 위로 올라간 것인지, 그녀가 지나가기 전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고양이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잠시 정의를 응시하더니,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건너 골목길을 뛰어 넘어 갔다. 고양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공허함과도 같은 묘한 느낌과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이었다. 뭘까 알 수 없는 감정의 바람이 골목길로부터 불어온 것 같았다. “새까만 고양이, 같아.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처럼, 반짝이던 고양이의 눈이 인상적이라, 정의는 생각했다. 냐옹. 


굽이졌던 골목길이 끝나고, 정의는 다시 익숙한 길에 접어들었다. 갑자기 사방은 소음으로 가득했고, 아직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도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바빴다. 고개만 돌리면 있는 골목길이 그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곳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 같았다. “크로플… 곧 도착이네.” 정의는 속으로 되뇌며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길, 그리고 곧 만날 크로플을 생각하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잠시의 골목길 탐험은 끝났고, 이제 그녀의 시선은 다시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냐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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