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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Aug 31.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4화

정원이라 피어난 꽃과 책

골목길을 빠져나오며 정의는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온 것은 골목길이었지만 들어선 것은 다시 하나의 세계 속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던 순간의 어둑한 분위기는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득하게 펼쳐진 공간이 눈 앞에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지 않고 나무들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있는데도, 시야는 넓게만 넓어졌다. 정겨운 주택들이 어깨 곁들로 늘어서 있던 골목에서 나온 그녀는 갑자기 탁 트인 시야에 어느 시원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가을도 아닌데 가을바람 같은 것이 살며시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고, 공기는 가을같이만 약간 서늘해져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으며 조금 더 나아가자, 그녀는 지금 그녀가 접어든 공간이 무엇인지 있을 같았다. 정의가 발 디딘 공원은 나지막한 동산 옆에 위치해 있었고, 주변의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길가로 나가 시야를 돌려보면 저보다 훨씬 높은 건물들이 가득 보일텐데도, 나즈막한 동산은 공원을 지키는 어떤 막이처럼 있었고, 동산으로부터 내려와 길 앞에 앉은 공원은 지침조차 쉬어가는 작은 쉼만 같았다. 공원 주변으로 큰 도로가 있었지만, 이곳의 고요함은 그 어떤 도시의 소음도 막아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의는 자전거를 멈췄다. “여기, 이런 곳이 있었나?”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공원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낡은 벤치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고, 아이들이 놀던 흔적이 남아 있는 오래된 놀이터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끈 것은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전거에서 내리며 여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는 그 여성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그 분위기,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정의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정의가 속한 세상의 리듬과 다른 운율의 세계에 맞춰 숨을 쉬는 것 같은 그녀의 가장 가까운 나무에서는 그녀가 읽고 있는 책에 꽂히려고 그러는 지, 이른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녀에 가까워지던 낙엽은 그녀의 곁에 잠시 더 머물려는 듯이 천천히, 느긋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지, 사람인가. 이런 곳에서 책을 읽다니, 이상하네, 이상한데.” 

정의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의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여성은 온전히 저 공원의 한 조각이 되어서 하나의 자연이 되어 있었다. 


여성은 정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정의 뿐만 아니라, 정의가 속한 세상과는 상관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손에 든 마법 같아 보이는 책에 온전히 집중한 여성의 얼굴은 고요했고,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정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저런 모습… 나도 언젠가 어른이 되면 저렇게 여유롭고, 차분하게 보일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마주한 자의 마음으로 정의는 여성이 만들어내는 모든 분위기에 매료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원은 도시 한가운데 있지만, 이곳만은 어떤 자연의 시간을 따르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치며 작은 소리를 냈고, 어딘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잔잔했다. 공원을 채운 잔디밭에서는 가끔의 풀벌레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이 모든 자연의 소리들이 여성의 차분한 독서 장면과 어우러져,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다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여성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을까?” 정의도 책을 읽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책을 읽는 것은. ” 저렇게 책을 읽는 것은, 저런 모습은.  외부의 모든 것을 밀어내려는 듯이 책에 잠기고 있는 듯한 여성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숭고하기까지 해 보였다. 차르륵. 공원의 여성. 공원의 낡은 의자에 책을 읽던 그녀는 책장을 한 장 넘겼고, 제법 거리가 있는 정의는 책장을 넘기는 그 소리가 귀에 터지듯 울리는 것만 같았다. 


정의의 생각은 점점 깊어졌고, 자신도 모르게 공원 안으로 조금씩 더 다가갔다. 여성이 읽고 있는 책 표지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의의 고개를 갸우뚱해졌다. “저 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맞아. 전에 서점에서 봤던 그 책이잖아. 내가 사려다 말았던…” 익숙한 표지의 그 책은 친한 선배가 좋아하는 책이었다. 그 선배가 좋아하던 그 책을 정의도 좋아하고 싶어서 서점에 갔을 때, 정의가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롭게 디자인되어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된, 그런 책이었다. “그 책을 저렇게 집중해서 읽는 걸 보면, 확실히 좋은 책이긴 한가 봐.” 정의의 책상에는 아직 그 책이 읽지도 않은 채 꽂혀 있었다. 모든 책들이 가지는 읽혀질 시간이 정의와 그 책의 사이엔 아직 다리를 놓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 시간의 문이 언젠간 열리겠지 싶어, 정의는 바로 그 날 당장부터 읽을 것처럼 서점에서 사서는, 책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부분에 꽂아두고, 읽지 않고 두고 있었다. 



정의는 다시 한 번 여성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조용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마치 공원의 일부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녁의 바람이 저녁 햇빛에 익어 밀려나고 있었고, 공원의 느긋한 나무는 바람보다 한 템포 천천히 스르륵, 가지를 젓고 있었다. 여성이 물든 공원은 물 속에 잠긴 작은 정원처럼 하나의 세게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의는 자신의 복잡한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평온하게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저렇게 차분하게,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여고생. 어른일 수 있는 하지만 어른이 되지 못하고 있는 나이의 언덕에서 정의는 학생과 여성성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고르고 있는 친구들 속에서 슬슬 자신의 자리를 골라봐야 야할 때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정의가 되고 싶은 미래의 정의의 모습은 저기 앉은 저 여성과 같은 느낌의 어른 여성이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함께 알 수 있었다. 정의는 저 여성의 모습을 바라기에, 저 여성의 모습은 정의의 어른에서 있지 못할 것 같다고. 정의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괜찮아,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어른이 될 거야. 저 사람처럼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결심하며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길은 여러 개의 갈래로 되어 있으니까. 

정의가 공원에 접했던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책은 한 장 한 장이 나무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벗어나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언젠가 또 이 공원에 올 수 있을까? 여기 다시 오면 또 저 사람을 볼 수 있을까? 그때는 내가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 길게 뻗은 길을 보았다. “지금은 크로플을 사자. 오늘은 오늘의 정의로. 그렇지만 오늘의 이 기억은 계속 남겨 둘거야.” 정의는 미소를 지으며 페달을 밟았다.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고, 공원의 고요함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정의가 이 공원에 다가온 적 없었던 것처럼, 공원은 공원의 세계를 지으며 그 안에서 그곳만의 계절을 피우고 있었다. 


공원을 지나 큰 길에 들어서자, 다시 도시의 소음이 그녀를 감쌌다. 버스가 지나가며 내는 굉음,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까지… 하지만 정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공원의 고요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여성의 모습이, 마치 꿈처럼 그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야.” 정의는 혼잣말을 하며 자전거를 계속 탔다. “정말 기분 좋은, 이상한 날이야.”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크로플 가게를 향해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크로플 가게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의 가장 특별한 순간은 이미 공원에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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