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전기와 배터리에 위장약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가며, 주변 풍경에 점점 더 몰입했다. 낡고 오래된 주택들, 가지런히 정돈된 작은 정원들, 그리고 그 위로 부드럽게 흔들리는 꽃들과 나무들. 바람은 여전히 따뜻했고, 그 속에는 미묘한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정의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정원에서는 붉은 장미와 노란 금낭화가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조용히 불어와 꽃향기를 실어 날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은 세상과는 다른 세계 같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바람에 스치는 나무 잎사귀 소리뿐이었다. -
“이 길… 어쩌면 정말 옛날에 읽었던 책 속 풍경 같아.” 정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전거의 핸들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학교에서 배웠던 문학 작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마도 국어 시간에 배운 교과서 속 이야기였을 것이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의 문장이 지금 이 순간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배웠던 소설… 그 제목이 뭐였지? 그 속의 주인공도 이렇게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을 거야.” 정의는 오르막길을 오르며, 그때의 주인공이 느꼈을 감정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 그때 그 사람도 분명 이렇게 고요한 마을을 걸으며 세상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나처럼….”
정의는 한동안 그 문장을 곱씹으며,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과 그때의 이야기를 겹쳐 보았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혼자만의 세계를 탐험하던 주인공처럼, 지금 정의도 이 길 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4차원이라고 하는 것도… 아마 이런 생각들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이게 너무 자연스러운걸. 세상은 이렇게 다채롭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
정의는 그렇게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은 여전히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저 멀리서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고양이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처럼, 이전부터 지금 있는 이 장소가 고양이의 온전한 자리인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의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왼쪽 귀가 살짝 까딱거린다. “저 고양이… 아까 그 고양이처럼 귀엽네.” 고양이는 정의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 그 고양이야?” 정의는 이번에도 대답을 해 줄 것을 기대하며 고양이의 눈을 마주했지만, 이번의 고양이는 정의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아니야?” 날 따라온 거 아니야?
다시 정의로 돌린 고양이의 눈과 정의의 눈은 마주친 채로 잠시 멈췄다. 고양이는 정의의 눈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고양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샛길로 사라졌다. 정의는 그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 고양이도 어쩌면 나처럼… 그럴까?” 대답은 저 밤 같은 고양이만 해 줄 수 있을테니 들을 방법은 요원하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정의는 갑자기 책 속의 주인공들에게 왜 그토록 자기만의 세계가 중요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끝이 없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같았다.
“이 길도 어쩌면 나만의 여행이겠지. 이렇게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행….” 정의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오르막길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고, 정의의 마음 속에는 따뜻한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이 길이 끝나면… 또 어떤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오르던 오르막길이 끝나자, 정의는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시야가 막혀 있었지만,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무대 같아. 매일매일이 다른 장면, 다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
그 순간, 길의 끝에서 다시 한 번 고양이가 나타났다. 이번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정의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정말 나를 따라오는 거야?” 정의는 고양이의 행동이 신기하게 느껴졌고, 왠지 모를 친근함을 느꼈다. 고양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 순간, 정의는 자신이 무언가 특별한 여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양이도, 이 길도, 그리고 나도…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정의는 고양이를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내리막길을 따라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그게 바로 재미있는 거야. 세상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니까.”
바람을 맞으며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정의는, 이제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은 다시 평탄해졌고, 도심의 익숙한 풍경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정의는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자전거를 몰며,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문학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책 속의 주인공도 이렇게 자신만의 길을 걸었겠지. 그 길 끝에 뭐가 있었을지… 나도 알고 싶어.”
그때, 자전거의 전기 화면에 경고 알람이 뜨기 시작했다. 네모난 모양에 더하기 표시 같은 아이콘이 깜박였다. “이게 뭐지? 무슨 뜻이지?” 정의는 자전거를 길가에 세웠다. “뭐지, 이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화면에 뜬 마크는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뜻이란다. “아… 배터리 부족이었구나. 그렇지, 며칠 전 오빠가 이 자전거를 탔던 것 같았어.” 정의는 자전거 배터리가 방전될 가능성을 생각하며, 오빠를 떠올렸다. 부산대 국어과에 다니는 오빠는 늘 정의를 귀여워했지만, 정의의 물건을 대신 쓰려 하거나, 정의가 하는 일을 따라 하려는 모습이 가끔은 귀찮게 느껴졌다. 특히 정의가 맞춤법을 틀릴 때마다 고쳐주는 모습은 어이가 없고 화가 나면서도, 또 재밌기도 했다.
“정말이지, 오빠는 왜 그렇게 자꾸 내 물건을 쓰고 싶어 하나 몰라. 그렇지만… 오빠가 없으면 또 허전할 것 같고. 복잡하네.” 실은 이 자전거가 오빠 것이라는 것을 떠올렸지만 정의는 잊기로 했다. 오늘 이 자전거를 타고 나오기 위해 집에 오빠가 들고 못 나가도록 자물쇠를 사와 채워둔 것을 발견했을 때의 오빠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뭐 어때.
배터리 경고가 떴다는 사실에 잠시 걱정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정보는 안심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경고가 떠도 5km는 더 갈 수 있대. 그럼 충분해! 크로플 가게까지는 이제 3km 정도 남았으니까… 괜찮아, 충분히 갈 수 있어.” 정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오빠가 자전거를 탔어도, 내가 그 덕분에 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거니까… 나쁘지 않네.” 정의는 속으로 오빠를 떠올리며 다시 페달을 밟았다. 이 자전거를 사서 집으로 가져왔을 때 오빠는 분명 뭐라고 한참 자랑을 했었다. 내리막길에서 충전이 된다고 했던가? 페달을 밟으면 배터리가 조금 채워진다고 했었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정의는
“그리고 이 길 끝에는 분명히… 정말 맛있는 크로플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에 더욱 집중했다. 바람은 상쾌하게 불어와 정의의 곁으로 다가왔고, 그에 밀어주는 듯한 기분이 드는 정의는 더 시원하게 나아가지는 듯한 길에 상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