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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03.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7화

잃어버린 것은 노랗고 노란

정의는 천천히 자전거를 몰아 부산의 번화가로 접어들어 갔다. 저녁이 되면서 거리에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 보였다. 어둠이 천천히 넓어지는 도로의 주변으로는 여전히 곳곳에 서 있는 간판들의 네온사인 중에 성질 급한 것들이 켜진 것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 모든 입구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가게들인 길에 따라가다 보니, 길 끝에는 커다란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커다랗고 높은 건물. 뭐든지 다 들어 있는 것 같은 건물, 백화점. 그 앞을 지나며 정의는 가볍게 속도를 줄여 보았다. 그때, 정의의 시야에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백화점 입구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가까운 곳. 정류장으로 가는 방향도 아니고, 백화점 입구를 향하고 있지도 않은 채, 아이는 있었다. 아이는 작은 체구에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귀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랑을 받았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한 밝은 옷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는 뭔가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서려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울지는 않고 있었다. 애타게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그 표정에 정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의는 자전거를 천천히 멈추고, 아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 근처에는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 아이, 부모님이 어디 계시지?” 정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처럼 바쁜 거리에서 어린아이가 혼자 서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저 사람일까, 아니면 저기 저 아저씨일까. 아이의 부모의 나이일 것 같은 사람들은 여자아이를 봐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갔다. 그나마 혼자서 길 한 복판에 서 있는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이의 부모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이의 표정은 울음이라는 턱밑을 향해 끝없이 차오르고 있었다. 정의는 이제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설마, 부모님을 잃어버린 건가? 정의는 마음속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안녕?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정의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정의를 바라보았지만, 곧 자신의 처지를 알리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없어졌어요…”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는 이 말을 할 수 있게 물어봐 줘서 고맙다는 듯 울음을 참으며 말을 했다. 

정의는 잠시 멈칫했다. “그랬구나. 혹시 엄마 이름이 뭐야? 어디서 떨어지게 됐는지 기억나?” 정의는 최대한 아이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차분히 물어보았다. 아이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는 새로 나온 뭐가 있다고 해서 백화점에 왔어요. 뭐더라...” 아이는 마치 그 단어를 떠올리기만 하면 엄마를 바로 찾을 수 있을 듯이, 필사적으로 뭔가를 떠올렸다. “맞아, 향수요.” 그런데 제가 잠깐 다른 걸 보다가… 엄마를 놓쳤어요.”

정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내뱉은 아이의 표정은 해냈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다음은 정의의 몫이었다. “알았어, 그러면 우리가 엄마를 같이 찾아보자. 괜찮지?”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의는 그 작은 손을 잡고 함께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향수라고 했다. 그럼 아빠와 엄마 중에 엄마랑 왔겠지. 따릉. 사람의 키보다 아득히 높은 문을 열어 백화점으로 들어섰다. 백화점은 저녁시간에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매장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곳곳에서는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아이는 정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의는 백화점 매장 안을 바라보는 아이를 잠시 내려다보고, 아이와 함께 향수 매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장은 백화점의 한쪽 끝에 있었고, 그곳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매장 입구는 사람들이 많아 혼잡했고, 매장 안에서는 다양한 향기가 섞여 정의의 코를 간질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이의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는 여자 아이. 이 낯선 조합에 향수 매장의 직원들은 이들 둘을 힐긋거렸다. 시간은 보통의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시간보다 조금 전. 이 시간이면, 식료품 매장을 향해 걸어 내려가다가 실수로 잡힌 매장에서 향수를 구매하게 되어버리는 아줌마들도 적을 시간이다. 충분히 구경하고 시선을 둘 만하지만, 돈이 되지도 못하고, 남자도 아니고, 상품을 사줄 것 같지도 않은 둘. 직원들은 이내 자기들끼리의 잡담으로 되돌아갔다. 

정의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이의 엄마가 어디에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엄마는 여기 없네… 혹시 다른 곳에 계실 수도 있으니까, 우리 조금 더 찾아보자.” 정의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불안한 듯 정의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정의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백화점을 가로질러 원래의 장소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시냇물 고개처럼 빠져들 나가고, 또 그만큼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가 서 있던 자리까지 왔지만, 아이를 찾느라 지쳐 보이는 아이 엄마 나이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근처에 계실 텐데…” 정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백화점 매장을 넓게 돌아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정의의 표정은 아이의 엄마를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보였다. 아이는 정의의 손을 잡은 채 짧은 다리로 종종 따르면서도 정의의 표정을 연신 살폈고, 정의의 표정은 아이에게 더 없는 안심을 주었다. 이 언니라면 반드시 엄마를 찾아줄 거야. 아이는 아직 정의의 이름을 모른다. 정의도 아직 아이의 이름을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는 정의를 믿을 수 있었다. 정의는 아이의 엄마를 찾아 줄 것이다. 정의의 표정에 다시 안심을 채운 아이가 시선을 백화점 건물 쪽으로 돌렸다. 엄마는 저 커다란 건물 상자 안에 있을 거야. 정의 또한 백화점을 바라보았다. 백화점 중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모두 문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느 문으로 들어갔는지 헷갈려서, 자신이 가려던 매장을 찾느라 그곳에 가는 동안 다른 매장에 잡혀서 물건을 사게 돼버리는 것, 흔한 일이다. 응? 내가 언제 그랬더라? 문득 정의는 백화점 매장의 입구가 네 곳이라는 것은 비슷해 보이는 공간이 네 곳이라는 의미이고, 아이의 엄마가 있을 만한 장소로 찾아볼 곳들이 세 곳들이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의는 아이의 손을 끌어 다시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백화점 내부는 은은한 조명이 부드럽게 퍼져, 마치 따뜻한 빛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그 빛 아래, 각양각색의 상품들이 진열대에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유리 진열대는 상품들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향긋한 향수 냄새가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쇼핑객들은 조용한 발걸음으로 매장을 돌아다니며, 부드러운 카펫 위에서 신발이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상품을 만지작거리는 손님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로 직원들이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가벼운 대화와 웃음소리가 섞여 백화점의 고요함 속에 아늑한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정의와 아이는 중간쯤 되었을 때, 한 브랜드 매장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인기 있는 캐릭터 인형들이 진열된 팝업 스토어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거나 인형을 고르고 있었다. 정의는 잠시 그곳을 지나치려다가,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했다.


“저기… 엄마가 저기 계신 것 같아!” 정의는 손을 들어 아이에게 가리켰다. 팝업 스토어 근처에 서 있는 한 여성이 아이의 엄마임을 알아본 정의는 서둘러 아이와 함께 그쪽으로 달려갔다. "엄마!!!"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그동안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엄마아!” 아이는 엄마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정의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아이의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딸을 안아주며, 정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아이를 놓쳐서… 너무 놀랐어요.” 엄마를 안은 채 우는 아이의 등을 두른 엄마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엄마의 다리 한쪽은 이미 버틸 힘을 다 써버린 듯,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정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아이가 혼자 있어서 놀랐어요.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에요.”

아이의 울음은 점차 잦아들었지만, 한 손으로는 여전히 정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예쁜 얼굴로 맛있는 거 먹자, 알겠지?” 정의는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정의의 손을 놓았다. "예쁜 언니!! 난 지율이야! 최지율! 고마워!"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아이는, 울음을 아직 멈추지 않은 채로 화사히 웃는 묘기를 정의에게 보여주었다. "그래, 지율이. 잘했어! 지율이 네가 엄마를 찾았어! 잘했어." 아이는 눈으로 계속 울면서 정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니는 정의야. 손정의." 손을 흔드는 정의에 맞춰, 아이는 위로 있는 힘껏 손을 뻗어 흔들었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손을 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정의는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잘 됐다. 다행이야. 같아서 두고 수가 없었네.정의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모르는 곳에서 엄마를 놓쳤던 같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의는 생각을 돌려 자전거를 두고 온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세워둔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정의는 당황해 버렸다. 자전거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어? 내 자전거가 어디 갔지?” 정의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자전거는 고급 전기 자전거였기 때문에, 누군가 훔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는 속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도둑이… 나, 자전거를 도둑맞은 건가?”


정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그렇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전화하려다,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이럴 때는 직접 파출소에 가는 게 낫겠지. 그래, 걸어가면서도 한번 더 찾아보자.” 잃어버린 물건은, 경찰이. 경찰이 찾아주겠지. 정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장 가까운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백화점 끝단을 한번 꺾으면 정류장이다. 

자전거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정의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녀는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을 원망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이 방심했던 것을 자책했다. 자물쇠를 제대로 걸어 놓았는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아까는 아이가 놀라지 않게 다가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던 정의의 눈에 문득 한쪽에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자전거였다. "어라?" 정의는 그곳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의는 자전거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맞네, 맞는데." 자신의 자전거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도둑이 훔쳐간 것이 아니라, 정의 자신이 출구를 착각하고 잘못된 곳에서 자전거를 찾아 헤맸던 것 같다. 


정의는 자전거를 다시 찾은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참 바보 같았네. 이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려나." 정의는 스스로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행운이 따르는 날인 것 같아!" 자전거에 다시 올라타면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 거리에 접어들 때보다 훨씬 따뜻한 만족감이 정의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들뜬 기분에 사로잡혀, 자전거를 타고 힘차게 길을 나섰다. 부산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며, 정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고 희망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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