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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04.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8화

학생이 공부를 할 시간에!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부산의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은 어느새 낮의 선명한 파랑에서 저녁의 따스한 붉음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마치 하늘 전체에 붉은 파도가 천천히 퍼져가는 듯,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에서부터 붉은 빛이 스며들어 점점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그 붉은 빛은 공기 속에 녹아들어, 거리와 건물, 가로수의 잎사귀에까지 따뜻한 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기온은 서서히 시원해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햇살의 잔여 열기가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길 가의 고양이들은 느긋한 저녁 바람에 취한 듯 고개를 흔들며 있었다. 바람결에는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듯한 부드러운 냄새가 섞여 있었고, 길가에 심어진 가로수들은 저마다의 향기를 바람에 살짝 흩날리며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마치 자연이 낮과 밤의 경계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고요하고도 평화로웠다.



조용한 주택가의 골목길에서는 담장 너머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냄새가 은근히 풍겨왔고,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노란빛들이 거리의 어스름 속에서 반짝였다. 작은 정원들에는 가벼운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이 있었고, 새와 동물들의 울음소리의 파문은 머얼리 멀리를 향해 퍼지고 있었고 그 사이로 이따금씩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정의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이 황혼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자전거 바퀴가 도로 위를 부드럽게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정의는 주변의 모든 풍경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햇살의 따스함, 바람의 부드러움, 그리고 하늘의 붉은 빛까지. 모든 것이 그녀에게 잔잔한 위로를 주는 듯한 저녁이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점차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의는 목이 마르자, 가까운 편의점을 찾아보았지만 눈에 띄는 곳은 편의점이 드문, 드문 동네였다. 대신 발견한 작은 간판을 보고 정의는 자전거를 몰고 다가갔다. 끼익. 오래되어 빛 바랜 간판 앞에서 정의는 자전거를 멈췄다. 동네 슈퍼. 동네 슈퍼라고 적혀 있는 동네 슈퍼.


벽면은 오래된 페인트로 덧칠되어 있었지만, 군데군데 벗겨져 나간 부분들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낮고 낡은 간판은 햇볕과 비바람에 지친 듯 색이 바랜 채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의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냉장고에서 뿜어져 나오며 얼굴을 스쳤다. 그 공기 속에는 오래된 나무 선반에서 풍겨 나오는 깊고 묵직한 나무 향이 섞여 있었다. 한때는 활기를 띠었던 공간이지만, 지금은 조용하고 차분한 공기가 가득했다.


정의는 작은 슈퍼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매장은 비록 작고 소박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각종 식료품과 생활용품들은 정돈되어 있었고, 노란빛 조명 아래에서 따뜻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진열된 물건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과, 오랜만에 찾아온 듯한 낯섦이 공존하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저녁놀이 천천히 퍼져가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슈퍼 안의 분위기도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듯했다.


정의는 음료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냉장고 안에는 다양한 음료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찾던 복숭아 맛 이온음료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파란색 캔에 예쁜 여자 아이돌들이 미소 짓고 있는 이온음료가 눈에 들어왔다. 정의는 그 음료를 집어 들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냉장고 문이 닫히며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정의는 그 음료를 손에 든 채로 슈퍼를 나섰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는 붉은 저녁노을이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마치 붉은 물감이 하늘 위에서 서서히 번져가는 듯, 하늘은 따뜻한 빛으로 물들어갔다. 정의는 길가에 위치한 작은 벤치에 앉았다. 오래된 나무 벤치는 시간이 남긴 자국들로 가득했지만, 여전히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녀는 음료 캔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한 청량감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고, 정의는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갈증이 사라지고 달려온 거리 만큼의 나른함을 느긋이 느끼고 있는 그녀의 앉은 자리 옆으로는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자리를 잡았다. 웬 고양이지? 정의는 오늘따라 비슷한 분위기의 고양이를 자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의가 달려온 거리가 얼만데. 같은 고양이일리는 없었다. "같은 고양이일 리는 없는데." 정의는 문생각난 듯 가방을 뒤져 보았다. 가방 바닥 까지 뒤져보았지만 원래부터 없었던 고양이 먹이할 만한게 갑자기 가방에 있게 될 리는 없었다. 슈퍼에사 살까. 고양이는 뭘 좋아한다지? "얘. 넌 뭘 먹니?" 그러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정의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앞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라도 물어봐야 겠다. 고양이 먹이할 만한 것도 파시냐고. 그렇게 일어나려는 순간, 정의가 일어서려는 것보다 아주 조금 빠르게, 고양이는 벤치 맞은 편 좁은 길 속으로 사라졌다.


털썩. 정의는 다시 벤치에 깊게 내려 앉았다. 주변을 살짝 둘러보니 벤치 옆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고, 그 안에는 최근에 심어진 듯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하늘색과 분홍색의 작은 꽃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저녁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순간, 정의는 자신이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녁 하늘, 부드러운 바람, 그리고 작은 꽃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손에 든 음료에서 조금 전까지 갇혀 있었던 시원함이 물방울이 되어 벤치에 떨어졌다. 톡. 벤치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자 정의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한 분의 할아버지였다. 동네의 한 구성원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70대쯤 되어 보였고, 손에는 적갈색의 단단해 보이는 오래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정의를 보자마자 느릿하게 다가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손녀를 대하듯 따뜻한 시선으로 정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냐?" 그의 말투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안심시키는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정의는 할아버지의 인사에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집에 가는 길은 아니에요. 가야 ㅏㄹ 곳이 있어요." 정의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캔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는 정의의 말을 들으면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바람에 날린 쓰레기가 작은 화단 옆에 쌓여 있는 것을 본 그는 천천히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벤치 옆 쓰레기통에 넣었다.  정의는 할아버지의 작은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는 척했지만, 그 행동이 마음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그저 골목을 정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배려와 사랑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이윽고 다시 정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손녀딸도 요즘 늦게 집에 오거든. 학교가 그렇게 늦게 끝나나? 왜 이렇게 늦게 돌아오는지 모르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정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학교가 늦게 끝나는 경우도 많아요. 심지어 더 늦게 끝나는 학교도 있죠." 할아버지의 걱정이 그저 우려가 아니라 손녀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자, 정의의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정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왜 이렇게 일찍 집에 가느냐?"


정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가는 중이에요."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눈빛은 여전히 따스하고, 정의를 걱정하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더 묻고 싶어 했지만, 정의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할아버지, 저는 이제 가볼게요. 건강하게 지내세요." 그녀는 음료 캔을 다 마신 후,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냐옹.


정의가 다시 길을 나서면서, 할아버지의 작은 배려와 말들이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크로플, 말씀 드릴 걸 그랬나. 한번 가보고 싶어하시지 않았을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의가 봤던 것은 낡고 파란 프라스틱의 쓰레기통에 차 있는 쓰레기들이었다. 누군가 버릴 것을 찾아 버린 것이 아니라, 길에 버려진 것을 모아 주워 버린 것 같은 쓰레기들. 그가 전해준 따스함은 정의에게 작은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길 위에 남은 할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따뜻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따라 달리며, 정의는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마음속에 신선한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대화가 남긴 따스한 여운 덕분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도시는 천천히 저녁의 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하늘 위로 퍼져나가며, 마치 물결처럼 부드럽게 번져갔다. 하늘의 붉은 파도가 골목의 끝을 감싸 안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길가에 켜진 가로등들은 하나둘씩 불을 밝히며 어둠을 밀어내고, 그 빛은 따스하게 번져나가며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고요한 주택가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길 위에 부드러운 황금빛 그림자를 드리웠고, 작은 가게들의 간판이 반짝이며 이곳에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상점 안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가 미묘하게 섞여 들어, 바람과 함께 정의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 실린 그 소리에는 도시의 저녁이 주는 포근함과 아늑함이 묻어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오늘 하루의 경험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해맑은 웃음, 할아버지의 따뜻한 조언… 모든 것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어져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 순간들이 하나하나 소중하게 빛나는 보석처럼 느껴졌다. 앞으로의 여정이 더 기대되었다. 정의는 더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게 된 자신을 발견하며, 마음속 깊이 잔잔한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하늘은 붉은 물결을 조금씩 거두며, 점점 깊어가는 밤의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길의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기대감에, 정의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길의 끝은, 마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문턱처럼 보였다. 정의는 저 멀리 펼쳐진 어둠 속으로 기분 좋게 나아가며, 그 안에 숨어 있을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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