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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05.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9화

중요한 것은 다리 밑에 있었어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부산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밤에 가까워진 저녁의 햇살이 포근하게 내리쬐고, 골목길 곳곳에 자리한 상점들은 알록달록한 간판들은 그녀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여름의 향기가 가득한 거리. 아직 남은 지난 여름의 잔재가 거리에는 사람들은 저마다 시원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작은 가게들 앞에 모여 있었다.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냉방기의 시원한 바람과 과일 향이 골목을 감싸며 여름의 분위기를 더했다. 정의는 자전거 핸들을 단단히 잡고,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속도를 더 높여보기로 했다.


“이번엔 어디 한번 힘차게 달려볼까!” 정의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며, 자전거 안장에서 몸을 살짝 일으켜 더 힘차게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정의가 힘을 주는 만큼 자전거의 화면에는 어떤 마크가 밝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어둠에 녹아들기 시작한 낮은 골목길은 마치 자신만의 레이스 코스처럼 느껴졌다. 시원하게 가슴을 스치는 바람과, 기분 좋은 소음 속에서 정의는 오롯이 자유로움을 느끼며 거리를 달렸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콰직!" 하는 금속 소리와 함께 자전거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정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페달을 멈췄고,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마치 순식간에 모든 것이 멈춘 듯, 그동안의 경쾌함은 사라지고 자전거는 천천히 멈춰 버렸다. "어, 뭐지?" 정의는 놀란 마음을 다잡으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사실 문제가 생겼다면 정의가 어떻게 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내려 어디에서 소리가 났는지 살펴 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느슨해져버린 체인이었다. "어라?" 체인은 그 자리에서 헐겁게 빠져 나와 덜렁거리고 있었고, 정의는 왠지 자전거의 움직임이 멈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의는 잠시 멍하니 체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골목길은 여전히 조용했고,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작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초조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뭐. 되겠지." 잘 되겠지. 잘 될거야. "일단은..." 정의는 자전거를 길가에 세우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체인이 왜 빠졌는지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햇빛에 반사된 체인의 금속이 반짝거렸고, 그 사이로 먼지와 기름이 묻어있는 자전거 기어가 보였다. 정의는 체인을 다시 걸어보려고 했지만, 손에 묻은 기름 때문에 자전거가 미끄러지며 잘 되지 않았다.


예전에 오빠가 자신에게 자전거 체인을 고치는 방법을 알려주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오빠는 꽤 진지한 얼굴로 설명해주었지만, 정의는 귀찮아서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었다. '그때 좀 더 제대로 배워둘걸 그랬나.' 정의는 살짝 후회하긴 했다. 고개를 내려보니 양손은 기름이 묻어 번들번들 했다. 기름 묻은 손을 바지에 살짝 닦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자, 다시 한번 봅시다." 다시 체인에 손을 대어보았다.



길가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상점의 주인 아주머니는 자전거 옆에 멈춰 선 정의를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손에는 방금까지 손질하던 꽃 화분이 들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화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정의에게 다가오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자전거가 고장 난 거니? 얼굴이 잔뜩 걱정이네.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정의는 예상치 못한 다정한 말에 살짝 놀라면서도, 그 따뜻한 눈빛에 마음이 놓였다. 아주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오자, 정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체인이 빠져서요. 혼자서 고치려 했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의의 말에 아주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전거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 순간, 골목길의 풍경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정의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고, 가게 앞에서 열심히 장사하는 상인들의 대화 소리도 느릿하게 귀에 스며들었다. 고소한 음식 냄새가 이따금 코끝을 간지럽히며, 작은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며 길 위를 나뒹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시간이 살며시 멈춘 듯, 정의는 이 순간 속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저녁놀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퍼져 나가는 파도처럼 골목 끝까지 닿아 있었다. 그 붉은 물결 속에서 정의는 마치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머니는 정성스럽게 자전거를 살펴보며, 차근차근 체인을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아주머니의 말에 정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긴장된 눈빛으로 자전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익숙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자전거를 다루어 온 것처럼 능숙하게 체인을 제자리에 걸었다. 그 순간 정의는 작은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 마주한 이 따뜻한 순간이,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체인이 다시 걸리자, 정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의의 말에 아주머니는 손을 털며 웃었다. "자전거가 아주 귀엽게 생겼네. 너처럼 단단해 보여. 학생 같기도 하고." 아주머니의 따뜻한 시선이 정의에게 머물렀다. 정의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조금 당황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자상한 눈길로 정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가렴. 자전거도 때로는 너처럼 쉬어가야 하니까." 그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정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조언처럼 다정하게 들렸다. 정의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손을 흔들며 정의를 배웅했다.


정의는 다시 자전거 위에 올라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 하늘 아래, 길게 드리워진 골목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길의 끝에는 분명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정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바람을 가르자,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바람의 차가움과 저녁 공기의 따스함이 교차했다. 바람 속에 묻어 있는 풀냄새와 흙내음이 정의의 마음을 더욱 경쾌하게 만들었다. 자전거는 부드럽게 길을 따라 달렸고, 정의는 그 속에서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느꼈다. 앞으로의 길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 미지의 여정을 향해 기쁘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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