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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02.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06화

거기 서, 크로플은 내꺼야.

정의는 한적한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나아갔다. 바닷가 도시의 복잡한 도심은 멀어져 가는 해안선 만큼이나 한가로와 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도로 위에 차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찻길은 조금 더 한산했고, 사람길은 조금 덜 한산한, 느그한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길 양쪽으로는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대부분은 이미 문을 닫았고, 가게 앞에 서 있는 간판들만이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은 이미 붉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고, 그 붉은 빛이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달릴 수 있겠어.”

정의는 고요한 밤의 공기를 들이마셔 모았다. 부산의 낮은 언제나 활기에 넘치고,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는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처럼 몰려드는 그 속에 부산은 짜디 짠 아이덴티티로 공기 중에 흩어져 있었다. 아주 부산스러운 곳에 가면 정의는 숨 쉴 틈조차 찾기 어렵다 느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고 밤이 깊어지면서 모든 것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부산이 오랜 시간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한 고요한 평화가 주변에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나뭇잎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너머로는 부산항에서 멀리 반짝이는 불빛들이 아련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불빛들은 마치 먼 바다의 등대처럼 고요한 밤바다를 감싸 안으며, 정의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모든 것이 잔잔하게 흐르고,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그녀만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의 공기는 낮의 뜨거운 열기와는 달리 선선하고, 살갗에 닿는 바람이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도시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안에서 그녀는 자유로움과 평온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며, 그녀는 다시 한 페달을 내딛었다.

정의는 페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지 않을 천천함으로 길을 따라 나아갔다. 따뜻한 햇살이 부드럽게 등을 감싸 안았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와 정의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날렸다. 공기를 가르는 바람 속에는 어디선가 피어오른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그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며 자연의 숨결을 전해줬다. 정의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가로운 시간, 바람. 자전거. 오늘은 좋은 날이야. 기분이 참 좋아. 세상에 나만한 그런 느낌.”

정의의 마음 한편에서 이 순간을 더 깊게 느끼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정의는 페달에 실은 발에 힘을 주어 보았다. 전기 자전거의 가속도가 몸에 전해지면서, 바람이 더욱 강하게 얼굴을 스쳤다. 속도감이 마치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귓가에는 바람의 휘파람 소리가 울리고, 눈앞에서 지나가는 나무와 건물들이 한순간에 희미해졌다. 정의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껴안는 듯한 자유로움과 가벼움을 느꼈다.


저기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부터는 작은 공원이 시작되고 있었다. 공원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그 푸르름은 오랜 세월을 지내온 듯 단단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가끔씩 스며드는 햇빛이 눈부신 점으로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다. 공원으로부터 나와 길로 나앉은 벤치들 중 하나에는 나이 든 할아버지 두 명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며 나무 사이로 흩어졌고, 그 속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공원의 고요함에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정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섰다. 할아버지들의 주름진 얼굴과 여유로운 표정 속에 담긴 세월의 흔적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따뜻함이 퍼져 나오는 걸 느꼈다. 그들은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세상에서 온 듯했다.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불어왔고, 정의는 그 속에서 세상이 전해주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이 순간도, 나도.” 정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이곳, 정말 오랜만에 오는 것 같아.” 정의는 생각하며 천천히 페달을 멈췄다.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녀의 볼에 따뜻한 감촉을 남겼다. 저 멀리서부터 전해져 오는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주변은 고요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가로수 옆에 서 있는 오래된 가로등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그 빛이 마치 어릴 적 추억을 부드럽게 비추는 것 같았다.


“어릴 때는 이 근처를 자주 지나가곤 했었지.” 정의는 잠시 눈을 감으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여기 근처에 정의의 아버지가 자주 데려오던 시장 맛집이 있었던 같다. 그때는 이곳이 더 활기찼던 것 같다. 길가에 늘어서 있던 작은 가게들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였고, 거리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자전거 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토록 조용하다니, 정말 신기하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을까? 그녀의 생각 속에서, 그리움이 따뜻한 잔잔함으로 흘러갔다.


정의는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야 했다. 그 앞에는 한적한 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점점 더 좁아지며 길의 형태도 불규칙하게 변해가는 모습이 보였다. 햇빛이 길 위에 부드럽게 내리쬐고, 길가의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그 사이로 점점이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길은 경사가 제법 있어 보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반복될 것 같았다. 그 경사를 따라 길의 표면도 점점 달라져 보였다. 오래된 아스팔트에는 작은 균열이 생겨 있었고, 그 틈새로 자라난 작은 풀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마치 자연이 다시 길을 채우려는 듯한 풍경이었고, 정의는 그런 디테일한 풍경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때, 정의의 시야에 왼쪽 골목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두 명의 고등학생이 잡혔다. 그들의 자전거는 마치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빛을 반사하며 다가왔다. 고등학생들의 티셔츠는 땀으로 약간 젖어 있었고, 그들이 자전거를 몰 때마다 숨을 크게 내쉬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왔다. 그들은 마치 경주를 하듯 자전거를 힘차게 몰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젊음의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제법 멀리서부터 그렇게 달려왔는지, 사거리를 를 향해 가까워지는 그들의 주변으로 그들과 함께 오던 땀들이 흩어지며 저녁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곧 사거리의 신호에 걸려 그들은 헉헉거리며 멈춰섰다. 한 학생은 입에서 숨을 고르며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학생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반짝였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주위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헉, 헉… 너 많이 빨라졌는데?” 한 남학생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너, 다리에 힘이 좀 풀린 것 같은데? 아니야?” 정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슬그머니 그들 옆으로 다가갔다. 자전거를 세운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두 남학생의 모습은 그들 나름의 경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정의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잠시 눈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의는 그들의 눈빛에서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듯한 미묘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어, 저 여자애… 우리를 보고 있는 거 아닌가.” 한 남학생이 친구에게 작게 속삭였다. 친구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런 것 같은데. 잘 좀 서봐. 멋지게 좀 서봐.”

정의는 두 남학생의 속삭임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시선은 그들이 타고 있는 자전거에 자연스럽게 머물렀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자전거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무언가 특별했다. 두 남학생의 자전거는 일반적인 자전거와는 다르게 날렵하고 가벼워 보였다. 프레임은 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바퀴는 마치 바람을 가를 준비가 된 듯 얇고 단단해 보였다. 체인은 완벽하게 조율된 악기처럼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정밀하게 맞춰진 기계 같은 인상을 주었다.

정의는 그 자전거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탄을 느꼈다. 그녀는 자전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이 자전거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묘한 기운이 있었다. 마치 그 자전거들이 길 위를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 저 자전거들... 정말 뭔가 대단해 보여."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자전거들은 단순한 탈것이 아닌, 경주를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무기 같았다.


정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신이 타고 있는 까만 자전거를 바라보았다. 오래된 자전거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정이 깊이 들어 있었다. 무겁고 덜컹거리는 순간도 많았지만, 이 자전거는 언제나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해주었다. "그래도... 역시 네가 최고야." 정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두 남학생의 자전거가 아무리 대단해 보인다 해도, 이 까만 자전거는 정의에게 가장 소중한 동반자였다.


정의가 자전거를 관찰하는 동안, 신호등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두 남학생은 자전거 핸들을 꽉 잡고 신호등을 주시했다. 그들은 앞에 있는 횡단보도의 녹색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입을 맞추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오, 사, 삼, 이, 일, 출발!” 그들이 숫자를 외치자마자, 두 남학생은 동시에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출발했다. 마치 경주에서 이기려는 듯, 그들의 발걸음은 빠르고 강하게 느껴졌다. 정의는 그들이 빠르게 출발하는 것을 보며 잠시 놀랐지만, 곧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자전거는 대단해 보이지만 자전거였고, 정의의 자전거는 전기 자전거였다. 정의는 빠르게 속도를 올렸고, 초반에 두 남학생이 출발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린 덕분에, 정의는 그들보다 훌쩍 앞서 출발할 수 있었다. “먼저 갈게!” 정의는 밝은 목소리로 외치며 두 남학생을 스쳐 지나갔다. 두 남학생은 정의가 빠르게 자신들을 추월하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저 여자애… ” 한 남학생이 당황하며 외쳤다. 그의 친구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내며 말했다. “놓칠 수 없지! 우리도 달리자!”


정의는 미소를 지으며, 전기 자전거의 속도에 몸을 맡겼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 속도, 정말 신나네.” 정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두 남학생이 빠르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경형 자전거에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한 것처럼 몸이 튼튼해 보였다. 정의는 그들이 금세 자신을 따라잡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남학생이 힘을 다해 페달을 밟으며 정의에게 다가왔을 때, 정의는 코너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가 가려는 길은 쭉 뻗은 길에서 대각선으로 꺾이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어떤 방향이라고 상관은 없지만, 지금은, 이번에는. 정의는 속도를 약간 줄이며 그대로 골목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정의는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꺾어 골목길로 들어섰다. 두 남학생은 힘껏 속도를 올린 채 정의를 따라잡으려 했지만, 정의가 갑작스럽게 옆길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골목길로 들어선 정의를 쳐다보며, 그대로 앞길로 빠져나갔다.


“어? 어어?” 한 남학생이 놀라서 외쳤다. 그의 친구는 자전거를 멈추며 말했다. “방금, 옆길로 빠졌어. 뭐지...”

정의는 이미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따라 멀리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두 남학생은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정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의는 길을 따라가면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쉽게 따돌렸네. 역시 네가 최고야.” 길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정의의 마음은 가벼웠다. 바람은 여전히 그녀를 따라 불어왔고, 부산의 밤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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