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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23.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17화

님아, 제발 그러지 마요

"다 팔렸냐구요."

"글쎄, 그러면 안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 팔렸으면 귀여운 아가씨가 울어 버리는 것 아니야?"


파트 17 : "장난꾸러기와의 주문" -------------------------------------------------------------------------


정의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달콤한 크로플 향기와 따뜻한 조명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이곳은 마치 그녀가 꿈꾸던 모든 크로플의 세계가 현실로 변한 듯한 느낌이었다. 내부는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고, 가게 벽에는 따뜻한 색조의 나무 판자가 세로로 붙어 있었으며, 그 위에는 간결한 고딕체로 적힌 메뉴가 세심하게 손글씨로 써져 있었다.


이런 크로플, 저런 크로플. '다 맛있겠다.' 다 먹어보고 싶은 걸. 욕심은 나지만 지금 정의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라도, 그게 어떤 맛이라도. 크로플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무슨 맛이든 어떠랴. 맛있을 것을. 정의는 정의의 손에 들어 올 크로플이 맛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좋아.' 


정의는 카운터 앞에 서서, 크로플을 주문하기 위해 다가갔다. 카운터 위에는 크로플을 만드는 철판과 여러 가지 재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철판 위에는 여전히 크로플의 달콤한 향이 배어 있었고, 여러 가지 장식용 소스와 재료들이 시각적으로 군침을 돌게 했다. 정의는 직원은 그를 맞이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끝에는 초코시럽과 딸기 시럽, 그리고 다양한 토핑이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의는 카운터를 보고, 직원을 보고, 다시 카운터를 보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다 팔렸다고 하면 어쩌지? 하지만 여기 크로플이 있는 걸. 안판다고 하면 어쩌지? 힐긋. 시계를 보니 이미 2분이 더 지나버려, 지금은 7시 32분이 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정의는 아직 입을 열지 않은 채였고, 직원은 이제 입을 열기 시작하는 채였다. 


“크로플을 원하시는군요!” 직원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한 손으로는 뭔가를 분주히 하고 있었다. “오늘 저희는 마법의 크로플을 준비해 드릴게요. 무엇을 담아드릴까요?” 마법의 크로플. 우와 마법의 크로플이었어. 부산의 한적한 동네의 작은 가게. 티비에 나왔지만 어마어마하게 유명하지는 않은 가게. 장난기 가득한 입가의 직원의 입에서 '마법'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이 곳은 마법의 장소가 되었다. 정의는 직원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잠시 멈칫했다. 아, 되는구나. 다행이야. “네, 크로플 하나 부탁드려요.” 직원은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눈으로 정의를 쳐다보며, 여러 가지 토핑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추천 토핑은 정말 많아요! 첫 번째로는 딸기와 블루베리 조합, 두 번째는 바나나와 초콜릿 조합, 세 번째는 크림과 견과류 조합, 네 번째는 마스카포네와 카라멜 조합, 마지막으로 시그니처 초콜릿 소스까지!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죠.” 직원이 말할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며 토핑을 설명해주었다. 그 손끝에서 떨어지는 초콜릿 조각들과 반짝이는 설탕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뭐지? 뭘 해야 하지? 뭘 골라야 할까. 정의는 직원의 말에 따라 각 토핑의 장점을 듣고 있었지만, 너무 많은 선택지에 압도당했다.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딸기와 블루베리? 아, 과일의 상큼함이 좋을지도. 바나나와 초콜릿은 너무 달콤하지 않을까? 크림과 견과류는 정말 고급스러울 것 같고, 마스카포네와 카라멜은 맛있어 보이지만… 초콜릿 소스는 이미 너무 많이 먹어봤던 것 같아.” 하는 생각이 혼란스럽게 스쳐갔다. 정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크로플을 살 수 있을까.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지났는데 괜찮을까. 조금 전까지 정의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 버렸다. 이미 정의는 어떤 소스에 크로플을 먹어야 가장 맛있는 맛을 보게 될 지에 집중해 버린 채였다. 정의는 주머니 속에서 지폐를 만지작 거렸다. 벽에 걸린 가격표를 보니 크로플을 두 개는 살 수 있을 만큼의 현금이 있었다. 두 개. 그럼 맛도 두 종류를 고르면 될까. 


가게의 벽에는 다양한 크로플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고, 그 중 하나는 초콜릿 소스가 흐르는 크로플을 아름답게 담은 사진이었다. 정의는 그 사진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 사진 속 크로플은 정말 맛있어 보였어. 그런데 저기서 추천하는 여러 토핑 중 어떤 것이 더 특별할까?”


직원은 정의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혹시 고민하시는 모양이죠? 그러면 제가 비밀 조합을 추천해 드릴게요. ‘초코시럽-초코칩-바나나-카라멜’을 넣어보세요. 이 조합은 마법의 맛을 만들어줘요. 다른 토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죠.” "우와... 그게 뭐에요? 다 넣는 그런 거에요." 하지만 벽에 걸린 메뉴판에 그런 긴 이름의 소스는 없었다. "하지만..." 정의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정의의 시선이 머문 곳을 알아챘는지, 직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밀 조합이니까요. 비밀 조합은 비밀로 해야지요." 찡긋. 직원은 정의에게 윙크를 했지만, 정의는 급하게 생각을 하면서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 있느라 직원이 직원툴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조차 구분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정의는 직원의 추천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비밀 조합이요? 그럼, 그 조합으로 해주세요.” 그녀는 직원의 유머와 진심이 섞인 조언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 조합이 정말 특별하다면, 한 번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지.”


직원은 크로플을 조심스럽게 준비하며, 정성스럽게 종이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종이 상자에는 고급스러운 포장지가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핑크색 리본이 묶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크로플이 하나씩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크로플 위에는 진한 초코시럽과 크리스피 초코칩, 바나나 조각, 그리고 카라멜이 뿌려졌다. 직원은 종이 상자를 들며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여기서 드실래요?”라고 물었다.


'자전거로 가야 하니까...' 정의는 포장으로 해야 했다. “포장해 주세요. 가져갈게요.” 아니, 생각해 보니 어차피 영업시간이 지난 가게니까, 포장 말고는 선택지가 없잖아? 정신을 차리고 정의가 직원을 노려보려니, 직원은 크로플을 종이 상자에 정성스럽게 담거 있었다. 직원은 마치 선택지가 있는 양, 포장인지 여기서 먹고 가는 것인지 물어봤지만, 애초에 포장 밖에 선택지가 없음에도 놀릴 의도가 분명한 것이, 포장을 위한 상자와 유산시도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애초에 포장용 상자에 담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포장하는 직원의 손 끝을 따르다 지금 정의의 생각은 온통 크로플의 맛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버린 상태였다. 포장된 상자를 정의에게 건네며, 정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가방에 넣었다. 가방 안에는 책 한 권도 없이 비어 있었고, 이 모습을 본 직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방이 너무 비어 있네요. 크로플 하나 넣기에는 너무 큰 가방인 거 아니니? 공주님?” 직원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의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가방이 크면 좋잖아요. 크로플이 안전하게 들어가면 되죠!” "하하하, 그건 그렇지." 


가게의 내부는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며, 가게 한쪽 벽에는 자그마한 장식들이 놓여 있었다. 예를 들면, 작은 구리로 만들어진 조명갓, 빈티지한 액자들, 그리고 따뜻한 느낌의 식물들이 가득한 선반이 있었다. 직원은 크로플을 포장하며 가게 한쪽 구석에 놓인 커다란 장식 시계가 작지만 잘 들리는 소리로 째깍째깍 소리를 내다, 정확히 7시 40분의 자리로 큰 바늘을 옮기고 있었다. 시계는 시간이 맞는지 아닌지 신경 쓰이는 듯한 복잡한 디자인으로, 한쪽 구석에서 잘 보였다. 


정의는 크로플이 담긴 상자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고, 이제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가게 내부의 아늑한 분위기는 예상치 못하게 너무 마음에 들었고, 짖굿었다 싶었던 직원의 장난은 크로플을 가방에 담고 보니 친절했었다 느껴졌다. 정의의 기분은 좋아졌다. 매우 좋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의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하며 가게를 나섰다. 직원은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다시 오세요, 공주님!”


자전거에 올라 사라지는 정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직원은 가게 밖에 놓여 있던 입간판을 거둬 들였다. 문득 시선을 둔 입간판 맨 밑에는 가지런한 글씨로 뭔가가 적혀 있었다. ‘초코시럽, 초코칩, 카라멜은 특제이기에 하나만 주문 가능합니다.’ 오늘 팔고 남은 크로플 세 개를 모두 정의가 가져간 포장 상자에 담아 버린 직원은 정의의 표정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와요, 공주님.” 오늘 밤 안주는 오랜만에 크로플 말고 다른 걸 맛봐 볼까. 


그 사이 가게 안쪽 정리를 마무리 한 주인이 나왔다. 가게 주인은 정리를 하다 말고 멍하니 길 한 쪽을 보고 서 있는 젊은 직원을 보더니 다가가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아들아, 장사는 마무리 잘해야지. 마지막까지 알뜰하게 팔아야지! 저건 네 월급에서 깐다.”

직원은 아버지의 장난스러운 타격에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 마지막까지 장사 잘한 아들에게 이런 대접을 하시면 안 되죠. 그래도 다행이에요, 오늘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네요.” "그러게. 귀여운 아가씨네." 


자전거에 올라 일어서 힘차게 페달을 밟는 정의는 등에 맨 가방이 올 때와는 달리 묵직해진 것을 느꼈다. '크로플, 해냈어.' 포장상자 너머로, 그리고 가방 너머로 정의의 등을 향해 따뜻한 어떤 것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 따뜻함을 따라 끝까지 장난기 어린 표정이 어려 있던 젊은 직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은 크로플의 방에는 크로플의 달콤한 맛에 대한 기대와, 작은 순간들이 만들어낸 행복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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