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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25.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19화

은하수 아래에서의 꿈

자전거로 집에 돌아가는 느낌이란 바퀴에 걸린 길이 집으로 이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정의는 그 길에 얹힌 채로 자전거와 손을 잡힌 채 함께 달려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바람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고, 자전거의 바퀴는 리듬감 있게 도로를 타고 있었다. 길은 점점 익숙해지고,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코스였지만, 오늘은 뭔가 조금 달랐다. 해가 점점 저물어가면서 저녁의 붉은빛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고, 저 멀리 나지막하게 깔린 황금빛 구름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의는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하늘이 정말 예쁘다." 그녀는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 멀리 서쪽으로는 이미 저문 태양의 흔적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고, 그 자리를 낯선 보랏빛과 낯익은 남색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드디어 기다린 듯 하나둘 별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별들은 하늘 한가운데서 작은 점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그 반짝임은 도시의 불빛과는 달리 깊이 있고 따스했다.

정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며 잠시 시간 속에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디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저녁 바람이 살짝 불어오며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차가웠지만, 정의에게는 오히려 상쾌함을 주었다. 그 차가움 속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가 그녀의 폐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 진짜 행복해.” 정의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언제가 행복한 걸까. 언제이기에 행복한 걸까. 정의는 그런 말을 잘 모르지만 행복하다는 것은 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고, 저 멀리 나무에서 나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왔다.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을 수없이 다녔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했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긴 했지만, 그녀 주위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이런 날은 애써 행복해야 해. 그러니까. '이 안에 있지. 행복이.' 정의는 한 손을 떼어 등에 맨 가방의 바닥을 만져 보았다. 살짝 들어보니 가방 안에 담겨 있는 것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길가에 심어진 나무들은 밤이 되면서 더욱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고, 그 나무 사이사이로 별빛이 새어 나왔다. 정의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그 향기를 맡았다.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섞인 그 특유의 자연스러운 향기는 그녀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숲 속 깊은 곳에서 산책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엄마가 좋아할까?" 정의는 길가에 피어 있는 작은 꽃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무심코 바닥에 앉아 꽃잎 하나를 살짝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꽃잎은 부드럽고 연약했지만, 그녀에게는 그 작은 생명 하나하나가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정의는 문득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 이곳에 피어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엄마에게 이곳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마 좋아할 것이다. 정의와 정의의 오빠의 눈에 보이지 않게, 정의를 가장 사랑하는, 그러나 엄마를 더 사랑하는 아빠를 포함한 가족의 누구도 깨지 않은 일요일이면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꽃을 다듬는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왠지 보면 안되는 것을 본 것은 아닐까 싶어 다시 잠든 척하다가 잠들었던 날. 


그녀는 한참 동안 꽃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저 멀리서 누군가 걷는 소리와 자전거 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도시의 번잡함 속에서 이런 고요한 순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정의는 그저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그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아냈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려던 순간, 그녀의 손가방 속에서 작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정의는 가방을 열어 그 작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아까 마켓에서 산 작은 도자기였다. '어어.' 내가 이걸 샀구나. 가끔 정의는 정의도 모르는 정의가 나타나는 것 같다. 영수증도 있으니 그냥 가져온 것은 아니겠지. 그 작은 도자기는 여전히 그녀의 손안에서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가만히 그 도자기를 들여다보며 정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됐다. 이걸 엄마에게 선물해야지… 엄마가 정말 좋아할 거야." 이 도자기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날 정의가 느꼈던 따스함과 사랑이 담긴 작은 보물이었다. 엄마도 그 순간을 떠올려 줄까? 모르지. 몰라도 좋아. 


밤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별들이 하늘 가득 반짝이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별빛은 마치 정의의 마음속 작은 불빛과도 같았다. 그 불빛은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작은 것들로부터 나오는 빛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정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그 바람조차 따스하게 느껴졌다. 자전거의 바퀴는 부드럽게 도로 위를 굴러갔고, 그 소리는 밤의 정적 속에서 가벼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정의는 하늘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의 이 순간들을 꼭 기억할거야." 혹시 모르잖아. 저 별도 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 세상 일은 모르는 거니까. 안그래? 그러나 대답해 줄 이가 없으니까. 

별들이 계속 반짝였고, 그 반짝임은 정의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았다. 오늘은 단순한 하루가 아니었다. 가족과 나눌 작은 보물들, 그리고 자연과 함께한 소소한 순간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정의는 그 따스함을 가슴에 품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정의는 자전거를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달렸음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별이 가득한 밤하늘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이는 별들을 하나하나 더듬듯 따라갔다. 손을 내밀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별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어, 저게 오리온자리인가? 아니면 카시오페아?” 정의는 혼잣말을 했다. 아마. 이렇게 계속 물으면 언젠가는 어느 별이 대답을 해 줄지도 모르지. 별들의 위치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려 했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는 살짝 달라 보였다. 하늘에 그려진 무수한 점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어졌다.


"별들은 정말 신비해." 정의는 속으로 말했다. "저 별들 중 어느 하나도 똑같지 않겠지?" 너도 세상의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아. 별이 그렇게 말해준 걸까. 그녀는 어린 시절에 밤하늘을 보며 썼던 상상 속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별이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 믿었다. 각기 다른 별들에는 각기 다른 이름이 있고, 거기엔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 거라고. 그녀는 다시 그 어린 시절의 감성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하늘로 뻗었다. “혹시, 이 별들에도 이름이 있을까? 내가 모르고 지나쳐 버린 이야기가 담겨 있진 않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자전거에서 내렸다. 차가운 콘크리트 도로에 앉아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앉은 이 길은 평소에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지금은 텅 비어 조용하기만 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숨을 고르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오늘은 정말 특이한 하루였다. 아침에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지만, 그마저도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친구들과 웃음이 터져 나왔고, 방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다. 부산의 번화한 거리를 벗어나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정의는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장소들을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시장에서 만난 상인과 도자기였다. 그 상인은 정성이 가득 담긴 도자기를 만들어 보여주었고, 정의는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가게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걸. 


그 도자기는 지금 그녀의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정의는 가방을 열고 조심스럽게 도자기를 꺼내 들었다. 작은 손안에 꼭 들어오는 크기의 도자기, 손가락으로 만지면 표면이 매끄럽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작은 물건 안에 담긴 정성과 역사를 생각하면, 그 가치는 가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의는 가만히 도자기를 들여다보았다. "엄마에게 선물해야겠다. 이 도자기를 보면 엄마도 좋아하시겠지?" 정의는 미소 지으며 도자기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정의가 있는 이곳은 고요했다. 별들 아래서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그녀는 그 시간 속에 잠시 머물렀다. 눈을 감으면 상쾌한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바람 속에는 나무 냄새와 밤 공기의 시원함이 섞여 있었다. 정의는 두 팔을 펼치고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그녀는 몸을 흔들며 작은 속삭임처럼 "정말 편안해…"라고 중얼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가 정의는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할머니와 함께 여름밤을 보내던 기억이었다. 할머니는 항상 별들을 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별들마다 주인이 있고, 그 별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준다고 하셨다.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던 기억이 났다. 정의는 별들을 보며 속삭였다. "할머니가 말했던 별, 나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하늘에 그려진 수많은 점들 중 하나를 골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별은 할머니 별일까? 아니면, 나를 위한 별일까?" 그 질문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정의는 스스로 미소를 지었다. 별은 그저 하늘에서 고요히 빛나고 있을 뿐이었지만, 정의의 마음속에서 그 빛은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그 별빛을 마음에 새겼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정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페달을 밟기 전에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될까?"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내일은 또 다른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특별한 하루가. 정의는 자전거의 페달을 천천히 밟기 시작했다. 밤하늘 아래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고, 길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오늘 밤, 이 별빛 속에서의 순간은 정의의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도시의 소음과 분주함 속에서 찾은 이 고요함은 오랫동안 그녀를 따뜻하게 해 줄 것 같았다. 별빛은 희미하게 반짝이고, 그 반짝임은 마치 정의의 꿈과 소망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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