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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29.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23화

다리 위에서 만난 보트의 인사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저녁 하늘 아래로 달리고 있었다. 하늘은 노을빛에 살짝 붉게 물들었고, 가끔씩 내리던 비는 이제 작은 방울로 변해 대지를 은은하게 적시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는 마치 멀리서 속삭이는 듯 고요했고, 그 속에서 자전거 바퀴가 물웅덩이를 지나며 튕기는 소리가 이 정적 속에서 유일한 생명처럼 들려왔다. 바퀴가 도로 위에서 만들어내는 그 소리가 정의에게는 일상의 소음 사이에서피어나는 부드러운 리듬처럼 느껴졌다.


길가의 상점들은 하나둘 불을 끄고, 또 켜고 있었고, 어둠은 서서히 거리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서 켜진 가로등과 가게 간판들은 그 속에서 따스한 빛을 내뿜으며 길을 비춰주었다. 정의는 조용히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향하는 길을 찾고 있었고, 자전거 바퀴는 어느덧 작은 다리 앞에 멈추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기 쉬웠던 이 다리가 오늘은 다르게만 보였다.


다리는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를 건너면 강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비에 젖은 강물은 노을빛을 받아 반짝였고, 잔잔한 물결은 작은 속삭임처럼 은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정의는 조심스레 다리를 지나가며 나무 판자에서 나는 특유의 나무 냄새와 발 아래서 느껴지는 나무의 부드러운 질감을 느꼈다. 물과 나무가 만나 내는 소리는 상쾌한 바람에 실려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걸어서 지나갈 때는 몰랐던 낯선 느낌들이 다리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다리에 첫 발을 내딛기전 등에 맨 가방에 손을 대어 보았다. 잘 할 수 있지? 그러고 보니 크로플이 우는 소리를 내면 크로플 하고 울려나. 아니면 크로- 하고 울려나. 풀풀은 아니겠지.


다리를 건너던 중, 정의는 다리 아래 강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보트를 발견했다. 그 보트 위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은 우산을 펼쳐 비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비를 피하는 마음 보다는 오히려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하늘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그들은 맑은 하늘을 보며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다.


정의는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다리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웃으며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고, 정의 역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작은 우산 아래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비 오는 날씨와 상관없이 그곳에 따뜻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정의는 그 순간,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그들의 활기찬 인사를 받은 뒤에 다시 자전거에 올랐지만, 그들의 환한 미소가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참...사람들 사이의 작은 인사가 이렇게 큰 의미가 있을 줄이야,' 정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정의는 반에서 인사를 크게 하기로 인상이 깊은 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사를 하겠다는 결심이나 인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나 인사를 꼭 해야한다는 강박과는 달리, 단지 어서 교실에 들어가고픈 생각해 큰 마음 만큼이나 큰 목소리가 나와 버리는 것이다. 아마 정의의 인사를 받은 친구들도 이렇게 기분이 따뜻해 지고 그랬을까? 그랬겠지.


보트는 강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물방울이 떨어지며 작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물에 비친 다리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정의는 바람에 실려 오는 비 냄새와 풀 내음, 그리고 강가의 촉촉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비가 그치면서 공기 중에 퍼지는 그 싱그러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녀의 손끝에는 아직도 우산을 흔들며 웃고 있던 그들의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자전거 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정의는 느리게 페달을 밟으며 길을 따라 나아갔다. 주변의 나무들은 비에 젖어 더욱 푸르름을 뽐내고 있었고,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면서 저녁 하늘이 붉은빛에서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붉은 노을과 어슴푸레한 별빛. 그 장면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우와... 진짜 예쁘다!" 정의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비록 혼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다리 아래 보트 위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오늘 하루의 모든 순간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멈추면서, 도로는 다시 말라가고 있었지만, 그날의 경험은 그녀의 마음에 여전히 촉촉하게 남아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에서 천천히 내려 다리 난간에 손을 얹었다. 난간은 비에 젖어 조금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기분 좋은 자극으로 느껴져 기억하고 싶어졌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은 그녀를 더욱 선명하게 이 순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난간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이제 다리에서 멀어지는 방향을 타고서, 보트 위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우산이 비에 젖어 반짝이고, 그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참, 따뜻해.” 정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는 아직도 가늘게 내리고 있었고, 물결이 잔잔하게 다리 아래로 퍼져 나갔다. 물방울이 강물에 떨어질 때마다 파문이 일어났고, 그 파문이 마치 정의의 마음 속에 새겨지는 작은 행복의 흔적들 같았다. 그녀는 코끝에 닿는 촉촉한 비 냄새, 물에 젖은 흙 내음, 그리고 바람에 실려 오는 상쾌한 풀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정의는 눈을 감고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을 만끽했다. 바람 속에서는 비가 내리는 소리와 함께 다리 밑에서 부서지는 물결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보트 위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마치 하나의 음악처럼 정의의 귀에 스며들었다. 정의는 잠시 그 자리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와 향기, 촉감을 느끼며 이 평화로운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


“이렇게 비 오는 날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있어.” 정의는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비록 자주 있는 순간은 아니지만, 이런 작고 소중한 시간이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웠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더 큰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조금 더 달리며 정의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주변의 나무들은 빗물에 젖어 더욱 짙은 초록빛을 뽐내고 있었고, 길가에 작은 풀잎들도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그녀는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다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순간이 눈앞에서 멀어지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그 다리 위의 풍경이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정의는 고개를 숙여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작은 순간들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조용히 웃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길을 나서는 순간, 정의는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가 살짝 떴다. 노란 가로등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며 빗방울에 반짝이는 모습이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자전거 핸들을 잡은 손에 비에 젖은 촉감이 스며들었지만, 그것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감겨있는 머리카락 끝이 간지럽히며, 그녀는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오늘 하루 참 신기했지.’

정의는 오늘의 작은 여정을 되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작은 사건들이 어떻게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왔는지 생각했다. 다리 위에서 만난 보트 위의 사람들, 그들이 보여준 따뜻한 인사, 그 모든 게 단순한 하루 속에서도 특별한 순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비는 여전히 잔잔하게 내리고 있었다. 가끔씩 길가에 있던 작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톡톡’ 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정의는 그 소리마저도 즐겼다. 왠지 그 소리가 리듬을 타며 그녀를 위해 연주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길을 지날 때마다 자전거 바퀴가 물웅덩이를 밟으며 만드는 잔잔한 파문도 그녀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저 물결이 퍼져나가는 모양이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은 인사 같은 거 아닐까?’ 생각해보니, 아까 만난 보트 위 사람들의 인사는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서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정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지만, 그 비 속에서도 하늘은 은은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노을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며 어둠과 싸우듯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정의는 그 빛이 자신의 마음속에도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건 좀 아쉽겠지?’ 정의는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두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상쾌했다.


“하늘도 참 멋지다,” 혼잣말을 내뱉으며 정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길을 달리며 그녀의 마음은 마치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이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롭고, 마음속에 작은 빛을 남기는 것 같았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빗물이 반짝였다. 정의는 가끔씩 지나가는 고양이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길모퉁이에서 잔디 위에 앉아 비를 피하던 작은 고양이는 정의의 자전거 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 특유의 신비로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양이와 짧게 시선을 마주친 정의는 미소 지었다. "너도 비 맞기 싫지?" 고양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지만, 정의는 그 고양이의 태도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작은 추억으로 쌓여가는 것 같았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정의는 또 한 번 자신이 느낀 것을 되새겼다. 오늘 하루의 여정은 너무나 평범한 듯했지만, 그 속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이 모여 큰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은 인사 하나, 비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 그리고 그 순간의 느낌들. 그 모든 것이 결국엔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오래도록 기억될 특별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그 작은 인사와 장면들이 그녀에게 남긴 따뜻함은 언제나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정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페달을 밟았다. 길가에 핀 작은 들꽃들이 빗속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었고, 가끔씩 차가 지나가며 뿌린 물방울이 공기 속에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그런 모습조차도 정의에게는 하나의 예술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오늘 하루는 모든 게 다 예뻤어.” 정의는 속삭이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 비 속에서도 따뜻함과 평화가 넘쳐났다. 그런 세상 속에서 정의는 작은 기쁨과 행복을 다시금 느끼며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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