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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28.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22화

공사와 비, 그리고 보트 위의 인사

정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었다. 이대로 어디까지로든 가고 싶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도록. 하지만 끝은 언제든 있는 법이고, 길게는 집에 도착하면 이 길이 끝날 것이고, 짧게는 저 앞에서 작은 끝이 하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 잦아들었지만 여전한 빗소리 속에서도 저 곳으로부터 나오는 굉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 곳에는 빨간색 테두리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고 커다란 굴착기와 덤프트럭들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흙먼지가 공사 현장 곳곳에 뿌옇게 떠오르다 말고 비에 묻혀 내려앉아 진흙이 되어 주변에 떨어져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로는 철제 자재와 콘크리트 덩어리들로 어지럽게 뒤덮여 있었고, 인부들은 바삐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 이걸 어떻게 지나가지? 정의는 잠시 당황했다. 저기 한번 물어볼까. 이내 웃음을 지으며 공사 현장에 서 있는 한 인부에게 다가갔다. 인부는 거칠게 입은 작업복과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공사에 지쳐 보였지만, 정의를 보자 미처 정의가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길 막혔어요. 저쪽으로 우회해야 해요. 공사는 밤까지 계속될 거에요." 그의 목소리는 힘들어 보이면서도 사려 깊었고, 정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인부의 목소리 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화답한 정의는 자전거를 돌려 우회 도로로 향했다. 새로운 길은 예상보다 좁고 구불거렸지만, 그녀의 마음은 잔잔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길가에는 작은 나무들이 비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고, 비가 내려서인지 그곳에서 나는 풋풋한 나무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비에 젖은 도로를 자전거 바퀴가 스치며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바퀴가 지나간 뒤로 갈라진 물이 가로등의 불빛을 일렁이고 있었고, 다시 채워진 물이 고이며 하늘을 담아가고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 핸들을 단단히 잡고, 도로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빗방울이 이따금씩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은 싫지 않았다. 물이 가득 고인 웅덩이를 피하면서도, 정의는 마음 속에 싹트는 작은 모험심에 미소가 피어났다. 


좁은 길이 이어지는 동안 정의는 주변의 작은 것들에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잔디 위에서 맺혀 반짝이는 모습, 길가의 작은 꽃잎들이 빗속에서 더 생기있게 피어나는 풍경. 그녀는 그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만을 위한 특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비록 도로가 공사 중이라 우회하는 중이었지만, 그 덕분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비와 함께 머금은 자연의 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 정의는 이렇게 작은 모험이 주는 소소한 기쁨에 잠겼다. 아무것도 있으라 하지 않은 자연이지만, 정의는 이 곳에 이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잔잔해진 고요한 비는 이들의 생명의 소리를 정의에게 고스란히 들려주려드는 듯이 느껴졌다. 



잠시 가늘어졌던 비가 다시 조금 세차졌다. 도로 위의 물줄기들이 자꾸만 자전거 바퀴 주변을 흐트러뜨렸다.  잘 보니 약간 경사진 길은, 주변에 내리는 모든 빗물을 모아, 정의가 지나가는 길에 고이게 하고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 핸들을 단단히 잡고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물에 젖은 길은 예상보다 훨씬 더 미끄러웠고,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자전거가 흔들릴 듯한 긴장감이 정의의 몸에 감돌았다. "자, 괜찮아... 천천히 가면 돼." 속으로 되뇌며, 그녀는 숨을 고르고 발에 더 힘을 실었다. 한 번씩 바퀴가 빗속에 미끄러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균형을 잡아갔다. 우와! 

비가 바람에 실려 이따금 얼굴에 부딪히면, 그 서늘한 차가움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이내 정의는 그 감촉에 익숙해지며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 찬 공기가 마치 그녀를 깨워주는 듯, 또 하나의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다. 분명 비를 다 막아줄 텐데도, 빗속에 함께 잠겨 있던 우비는 정의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기라도 하면 정의는 자신의 피부가 펄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 날개라도 생기겠는걸. 정의는 신나고 있었다. 


길은 점점 좁아지면서 더 울퉁불퉁해졌다.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면서도 정의는 주변 풍경을 놓치지 않았다. 빗속에서 물방울들이 나뭇잎 위에 맺히는 소리, 그 빗방울이 떨어져 또 다른 잎사귀에 닿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이 모여 도로 위의 얇은 물층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자연이 연주하는 한 편의 음악 같았다. 나도 지금 노래를 하고 있을까. 함께 흥얼거려 보려고 뭔가를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실망은 아니지만 아쉽다 할 수 있게 흥 하는 소리를 내며 가자니, 자전거 바퀴가 물을 크게 튕겼다. 오케스트라에서 큰 징을 울리듯 튕겨나오는 소리가 이 시간의 모든 소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정의의 마음 속에 하나의 큰 파도처럼 감동을 일으켰다.


정의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비록 도로는 미끄럽고 불안정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순간들이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비가 내리는 동안 나무들은 더 짙은 밤의 초록으로 빛났고, 길가의 작은 꽃들은 햇빛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강인하게 서 있었다. 정의는 이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다시 페달을 밟았다. 작은 물방울들이 그녀의 바퀴를 휘감고, 얼굴에 스치는 감촉이 이따금 그녀를 소소한 웃음으로 이끌었다. 이 비 속에서, 정의는 자신이 세상과 함께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날씨는 궂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 그녀를 더욱 활기차게 만들었다.




조금 더 달리다 보니, 작은 다리가 나왔다. 자동차라면 한 대 지나갈 수 있고, 좌우로 사람길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돌로 만든 다리. 짧고 좁은 다리지만, 이 다리 하나가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있으니까. 수영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전거가 있으니까. 다리를 이용해야지. 소중한 다리잖아. 비가 내려서인지 다리의 표면은 반짝거렸고, 물방울들이 쉴 새 없이 떨어지며 얇은 물층을 만들어냈다. 이 다리는 평소엔 그냥 스쳐 지나갈 정도로 낮고 소박한 다리였지만, 오늘은 그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비 덕분인지, 다리가 마치 작은 세상 속의 비밀 통로처럼 느껴졌다. 정의는 천천히 다리 위를 지나며 다리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보트 하나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고, 보트 위에는 몇몇 사람들이 우산을 쓴 채 앉아 있었다. 작은 보트 위에서 하나의 운명으로 뭉쳐진 사람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보트 위에서 연신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를 피해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그들은 웃고 즐거워 하고 있었다. 자칫 빠질 수도 있는 물의 흔들림조차 즐거운 듯한 그 모습에 정의는 자신도 즐거워 지는 것 같았다. 비가 그리운 듯 느긋하게 앉아 있던 한 여자가 정의를 발견하고 먼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의는 자전거를 잠시 멈추고 그들에게 답례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보트 위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정의를 보며 손을 흔들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작은 웃음이 번졌다. "안녕해요!! 안녕해!" 물 위에서 반짝이는 빗방울, 그 가운데에서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특별하게 느껴졌다.


"저 사람들은 비도 참 즐겁구나." 정의는 스스로 속삭이며 자전거에 다시 올라탔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그 짧은 인사가 주는 소소한 기쁨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잔잔히 스며들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이런 날에도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미소와 인사는 묘하게 힘이 났다. 그들에게 받은 기쁜 감정은 정의의 하루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정의는 이런 일상 속의 작은 순간들이 얼마나 큰 행복감을 주는지를 새삼 느꼈다. 길 위에서의 작은 모험들과 맞바람, 빗소리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든 것들이 비 오는 날의 특별한 추억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며 불편했던 순간들, 도로 공사로 인해 우회했던 경험들, 그리고 미끄러웠던 길 위에서의 긴장감까지. 이런 일상의 작은 도전들이 오히려 정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되었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는 보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웃음을 떠올리며 자전거 페달을 다시 밟기 시작했다. 그들의 다정한 미소와 인사는 이 비 오는 하루의 끝을 행복으로 채워주었고, 정의의 마음에도 그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계속해서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소음이 더 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촉촉하게 젖은 도로와 이따금 스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사들이 어우러져, 이 순간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자전거 바퀴가 물방울을 튕기며 도로를 지나갈 때마다, 정의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떠올리며 가슴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비에 젖은 세상은 마치 새로운 색으로 물든 듯 반짝였고, 정의의 마음속에도 작은 기쁨의 파도가 일렁였다. 사람들이 보내준 친절한 인사는 비 오는 날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고, 그 순간순간이 특별한 기억으로 새겨지는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 정의는 자연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일상이 어우러져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


이제는 비가 내리는 소리마저도 정의의 귀에 음악처럼 들리며, 세상과 교감하는 기분을 느꼈다. 물방울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작은 하모니를 이루며, 정의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의 자전거 여행은 정의에게 단순한 귀가의 시간이 아닌, 소중한 순간들을 만나는 여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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