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어느 한 칸 #1
비 내리는 초여름 저녁, 공원에는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흙냄새가 비에 젖어 공기 중에 퍼졌고, 잔잔하게 흩어진 물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길 위엔 거의 사람이 없었고, 나란히 걷고 있는 둘의 발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을 채웠다. 얇은 우산 아래서 그들의 어깨는 아주 겨우만 맞닿아 있었다. 비에 젖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는 괜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우산 속에서 그는 잠잠한 표정을 하고 앞만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 옆에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의 옷에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어쩐지 더 그가 멀게 느껴져 손을 뻗을까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지만, 그 마음까지 다다르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발걸음을 맞춰 걷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각기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옆에 있는 이 순간조차 부서질 듯한 것처럼 느껴져 숨을 참듯 걸음을 옮겼다.
“비가 참 많이 온다.” 그가 나지막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았지만,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말투가 좋았다. 언제나 그의 말은 다, 다, 다로 끝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처음에는 그것이 무례한 말투인가 싶었지만, 빗속에 젖어 반짝이는 반석처럼 단단한 그의 말은 이제 그녀의 가슴에 무겁게 얹혀 있다. 한동안 말을 삼키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저도 말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졌고, 우산 아래에서조차 그의 손끝에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빗물이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을 잡고 싶었다. 한 번도 잡지 못했던 그 손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멈췄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곧 그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었고, 그가 애써 덮어둔 감정을 끄집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그를 잃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그녀를 갈등하게 했다.
“네가 있으면, 이런 날도 괜찮아.” 그가 갑작스레 말했다. 순간, 그녀의 심장은 마치 비에 젖은 종이처럼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래.” 그 말 속에 담긴 무게가 너무 커서, 입 밖에 내자마자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은 빗속에서도 선명했고, 고요하면서도 깊은 감정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와 함께 걷는 이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고, 그는 조용히 우산을 조금 더 기울여주었다. 그 순간, 둘 사이의 거리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의 어깨가 더 확연히 느껴졌고, 그의 온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러나 그 온기는 잠깐일 뿐이었다. 곧 다시 떨어져야 할, 끝을 알고 있는 온기. 그녀는 좀 더 앞을 바로 보았다. 뜻함이 바르면 바람이 이루어지잖을까. 그의 손이 우산의 끝을 거쳐 그녀의 어깨에 도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바랐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비가 멈추면, 그와의 시간도 멈출 것이다. 마치 비처럼 그와의 시간이 스며들어 있지만, 손을 내밀어도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될 것 같지만, 결국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빗속에서,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고, 그래서 더욱 아렸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둘은 멈춰 섰다. 그녀는 그의 옆에 서서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그와 함께 있는 지금의 공기가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곧 우산을 놓을 시간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면, 그와 함께 걷는 이 길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