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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28. 2024

노을에 머문 마음 (#2)

소설의 어느 한 칸 #2

여름의 끝자락, 해 질 녘 공기가 서늘해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인 것처럼 카페는 고요했고 창밖으로는 노을이 붉게 번져가고 있었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우리가 주고받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이 머물던 자리는 다른 곳이었으니까. 


커피 잔을 손에 쥔 채, 나는 그를 바라봤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게. 언제나 나를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다정했고, 그 다정함은 한없이 따뜻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무겁게 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그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 안에 담긴 깊이를. 알지만. 아니, 아니까 알 수 없었다. 아니, 알면 안되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말을 걸듯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아니, 해줄 용기가 없었다.


"생각이 많아 보여."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생각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그저 내 표정을 읽어낸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다. 그는 이렇게 나를 보고 있었다. 


"응, 그냥… 요즘 조금." 나는 짧게 대답했다. 더 이상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창 밖을 보았다. 더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솔직해지기가 무서웠다. 창밖에 비친 노을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늘은 붉은빛을 잃어가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하지만 나는 그 사랑이 두려웠다.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나 나를 무너뜨릴 것 같았다. 그 사랑이 너무 크고, 그 크기가 너무 깊어서, 나는 그 속에서 나를 잃을까봐 겁이 났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해도 돼."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 속엔 항상 그 자리가 있었다. 내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 그러나 나는 그곳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니 들어가려고는 했을까. 


"별일 아니야."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속은 복잡했다. 그의 다정함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를 그가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할 수도 없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지. 그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가 점점 더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부숴지고 망가져서 망가진 채 열릴 생각이 없는 방 안에, 들어간 적 없는 그의 온기가 피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다가옴은 부담이 아니라, 너무 당연한 흐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흐름을 나는 멈춰야 했다. 

그는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은 네가 멀게 느껴져." 그의 말이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멀게 느껴진다니,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그와 가까웠다. 그의 옆에 이렇게 앉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을까. 내가 정말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까. 아니면 이미 너무 멀어진 걸까.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내가 여기 있잖아."

하지만 그 말은 너무 빈약하게 느껴졌다. 마치 나 자신에게도 그걸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나도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게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 불안정했다. 그것은 결국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뭔데. 그게 영원이라면 영원은 아침 이슬정도,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것. 그런 걸. 그런 걸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사랑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와의 시간은 너무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이 내게 위태롭게 느껴졌다. 마치 손에 쥐면 부서져버릴 것 같은 유리잔을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나를 다루어도, 결국 그 유리는 깨지고 말 것이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너는…" 그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듯했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그 말을 하려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까. 나는 그가 그 말을 입에 머금고 있던 그 순간들을 모두 기억한다. 첫 번째는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공포에 잡혔던 그 날. 두 번째는 도망치던 나를 그가 찾아냈던 그 날.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그는 오늘 다섯 번째로 그 말을 머금고 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두려운걸까. 그의 감정이 점점 더 깊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 앞에 서서 방어막을 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밀어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러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 이제 가볼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아쉬움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숨겼다.

"그래, 조심히 가." 그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카페 문을 열고 나가면서, 그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을 알았다. 그는 항상 나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나를 압박했고, 동시에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나를 잡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떠날 수 없었다. 언제쯤 끝내질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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