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어느 한 칸 #3
늦은 밤이었다. 바는 어둑하게 조명이 깔렸고, 그 조명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듯 조용히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기나긴 하루를 마치고 바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피곤함과 동시에 어딘가 허전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리긴 했지만, 그 웃음은 목소리보다는 그들의 피곤한 눈에 어울리지 않는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나는 바 구석에 자리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반쯤 비어있는 잔을 손끝으로 돌리며, 한 모금씩 술을 입에 가져가곤 했지만, 그마저도 무심했다. 술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의 세상이 흐릿했고, 마치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꿈속의 한 장면처럼 실체가 없는 듯했다. 조명이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바닥과 벽에는 어두운 색감이 감돌았고, 그 어둠은 나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그 어둠 속에 깊숙이 숨어있으면, 내 자신도 누군가에게 잊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텐더는 숙련된 손길로 칵테일을 흔들고 있었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조용히 깔리는 재즈 음악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의 손동작은 마치 이곳의 배경 음악처럼 느껴졌고, 그 외의 소리들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가벼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고,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가 바 안을 메웠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들은 내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잔을 들어 다시 입술에 가져갔다. 차갑게 식어버린 잔 속의 액체가 입안으로 스며들 때, 그 시원함이 잠시 나를 깨웠지만 금세 다시 무거워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고요한 시간 속에서 혼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익숙했다. 무의미한 시간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마치 그 시간을 억지로 늘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스치듯 들어왔고, 그 바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문 쪽으로 이끌었다. 바의 안쪽 공기는 적당히 따뜻했지만, 순간적으로 들어온 바람이 그 따뜻함을 단번에 깨부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날카롭게 코를 자극하며 찬 공기를 몰고 왔다. 바람에 섞인 찬 공기가 내 옆을 지나가며 살짝 몸을 떨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왠지 그 차가운 현실이 더 명확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나는 무심히 잔에만 집중했다. 술잔을 돌리는 손끝이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며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감정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런 감정조차도 실체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조차 흐릿하게 느껴졌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 와서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무언가 달라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한 사람이 내 옆에 앉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소음과 함께 사람들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이동했지만, 내 곁에 다가오는 이의 발걸음은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앉아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와는 전혀 다른 리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리듬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마치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워졌고,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발소리는 가볍게 바닥을 스치며 나를 향해 다가왔고, 그가 내 옆에 앉자 마치 그 자리가 원래 그의 자리였던 것처럼 공간이 조용해졌다.
마치 모든 소음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 그 순간 나와 그가 있는 공간은 더 이상 바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기운이 내 옆을 감싸며, 우리는 서로의 공간을 자연스럽게 나누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로 무심하게 떨어진 눈동자가 나를 향해 돌아왔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속에는 낯설지만 익숙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가 내게 건넨 것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깊이에서 올라온 무언가, 그리고 그 깊이는 나와 공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 만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혼자야?” 그의 목소리가 낮고 부드럽게 내 귀에 스며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정보의 확인이 아니었다. 그건 그의 존재를 나와 함께 나누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응, 혼자."
그가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바깥의 바람이 다시 한 번 창문을 스치며 차가운 기운을 밀어 넣었지만, 그의 미소가 그 추위를 덮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 닿은 잔이 천천히 흔들리며, 그도 한 모금 술을 마셨다.
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공간에서, 이 순간에, 그와 내가 이렇게 만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바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음악과 주변 사람들의 대화는 희미해지고, 오직 그와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자주 오는 곳이야?" 그는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고요한 바람처럼 부드럽게 나를 감쌌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니. 그냥… 오늘은 이곳이 끌렸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이곳이 오늘은 유독 이끌었어."
그의 말에 내 마음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우리는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이유로 이곳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와 나, 둘 다 이곳에 있어야 했고, 그렇게 서로를 만나야만 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바텐더가 잔을 내놓으며 우리 사이의 흐름을 잠시 끊었지만, 그 순간마저도 자연스러웠다. 그가 조용히 잔을 들어올리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한잔 할래?" 그는 천천히 물었다.
나는 잔을 들어 그에게 답했다.
바 안은 따뜻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들의 대화는 마치 공기 중에서 부서져 흩어지는 가벼운 파편들처럼 나의 귀에 가끔씩 들려왔다. 옆 테이블에서는 와인을 즐기며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바텐더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그 바 안에 가득 찬 온도와 소음, 그리고 음료들의 향기는 마치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듯했다. 나는 그 속에서 고독함을 감싸 안고 있었지만, 그 고독조차도 위로가 될 만큼 익숙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술잔을 들었다. 술은 천천히 잔 속에서 흔들리며 그 안의 빛을 반사했고, 그 차가운 잔의 온도가 손끝에 스며들었다. 마시지도 않고 바라보고만 있는 내 모습은, 마치 이곳의 시간 속에 갇힌 듯했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공간은 여전히 따뜻한 불빛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나만이 그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것은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바깥에서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나를 스쳤다. 문턱을 넘어온 그 바람은 따뜻한 공기를 찢고 들어와 순간적인 한기를 가져왔다. 그 찬 기운에 사람들이 잠시 고개를 들었고, 나 역시도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은 나직한 발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그가 내 옆에 앉을 거라는 확신을 느꼈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또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앉자마자 공간은 묘하게 편안해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가 자리에 앉은 순간 우리는 같은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되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무심하게 떨어진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갔다. 그 순간, 세상은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도, 낯선 이에게서 느낄 법한 감정도 아니었다. 그 너머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내가 그를 알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니,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무의식 속에서 그를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 친숙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밀려왔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의 눈 속에는 나의 내면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그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더 깊은 것이 있었다. 알 수 없는 그러나 확실한 친밀감. 우리는 서로를 처음 본 것이 분명했지만, 그 감정은 처음 만나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자서?"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그 낮은 음성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이 묻어 있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가 묻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와 그의 존재를 공유하고자 하는 신호 같았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우리는 이 바 안에서 둘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따뜻한 불빛은 여전히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 그러나 나와 그의 공간은 그 모든 것과는 별개였다. 우리는 그 공간 속에서 고요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응, 혼자." 나는 짧게 대답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음기를 보이며 말했지만, 그 미소 뒤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존재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무언가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그가 앉은 순간부터 주변의 온도가 서서히 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깥에서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의 미소는 그 찬 공기를 사르르 녹였다.
그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혼자서 이곳에 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사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을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와 나 모두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도 나처럼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고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자주 오는 곳인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그냥… 어쩌다 들어오게 됐어."
사실 이곳은 나에게 익숙한 장소는 아니었다. 오늘, 어쩌다 발길이 이곳으로 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나는 같은 이유로 이곳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마찬가지로 이곳에 이끌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래. 그냥… 여기가 오늘은 끌리더라." 그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따뜻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 그와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이유로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우연이 아닌 필연처럼, 우리는 이곳에서 만나야만 했던 것 같았다.
바텐더가 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우리의 대화를 끊었지만, 그조차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가 천천히 잔을 들어올렸다.
"한잔 할래?"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가 내민 잔을 들었다. 우리의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 안에 가볍게 울렸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그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작은 소리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축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바 안은 여전히 그 특유의 따뜻한 빛으로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조명은 무심한 듯 부드럽게 사람들을 비추고, 공기는 낮은 대화 소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술잔들이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작은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이곳의 모든 것은 흐름에 맞춰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웃고 대화하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마치 그 흐름과는 다른 시간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있었고, 그의 미세한 움직임조차도 공기를 흔들리게 하는 듯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잠깐 스쳐보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바 뒤편에서는 바텐더가 능숙하게 술잔을 닦고 있었다. 이곳은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그와 나는 이 군중 속에서 따로 떨어진 작은 섬처럼 고립된 느낌이었다. 따뜻한 조명은 우리의 얼굴을 비추었고, 술잔에 부딪혀 깨지는 빛이 그 사이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내 옆에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도 그래. 그냥… 오늘은 여기에 와야 할 것 같았어."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고, 그 순간 나는 그가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말한 '오늘은 여기에 와야 할 것 같았다'는 말이 나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이곳에 온 것, 그리고 그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묻어나왔고,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마치 우리가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우연을 넘어서 필연처럼 다가왔다.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정말로 그랬을까? 우리는 왜 이곳에서, 왜 오늘 같은 시간에 만나게 된 걸까? 그의 말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그 말이 내 마음에 박힌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옆에 있었고, 그와 나는 이 순간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더 깊이 연결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자, 나는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안정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 눈 속에는 내 안의 고독과 불안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의 감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텐더가 우리 앞에 술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잠시 흐름을 끊었다. 유리잔이 나무 테이블 위에 놓이는 그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렸고, 나는 그 소리조차도 멀게 느껴졌다. 바텐더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손님들의 주문을 받았고, 우리는 그 소란스러운 바 안에서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작은 순간은 우리가 나누던 감정의 흐름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저 지나가는 흔적처럼,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천천히 잔을 들어올렸다. 잔 안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부드럽게 흔들렸고, 조명이 그 안에서 반짝였다. 그의 손끝에서 잔이 살짝 흔들리며 빛을 머금은 모습이 마치 그의 마음이 내게 흘러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는 그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같이 마실까?"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그 물음 속에는 단순히 술을 함께 마시자는 제안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순간을 함께 나누겠다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겠다는 제안이었다. 그가 건넨 그 말은 단순한 대화 이상의 것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나는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순간 그 말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나는 이미 어떤 연결점에 서 있었다. 그 연결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저 순간적으로 서로를 알아본 듯한, 알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었다. 그가 내민 잔을 받아들면서 나는 그와 함께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는 조용히 대답하며 잔을 들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며 잔을 부딪히는 그 순간, 작은 소리가 우리의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그저 잔이 부딪힌 소리일 뿐이었지만, 나에게는 그것 이상이었다. 그 작은 소리가 내 심장에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울림은 부드러웠지만 깊었다. 단순히 술잔이 맞부딪히는 소리일 뿐이었는데, 내 안의 무언가가 요동쳤다.
그 울림은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점점 퍼져 나갔다. 그 울림 속에서 나는 그와 나 사이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작은 소리 하나가 우리를 더 깊이 연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잔이 맞부딪힌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술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서로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잔을 입에 가져갔다. 술의 차가운 온도가 내 입술에 닿았을 때, 그 차가운 감촉은 순간적으로 나를 깨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나는 그와의 연결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내 안의 뜨거움이 점점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나는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고, 그 순간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이 있었다. 그의 눈 속에서 나는 그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 작은 잔의 울림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작은 움직임마저도 내게는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가볍게 내려앉은 잔에서 울리는 미세한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공기는 여전히 따뜻했고, 주변의 소음은 여전했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마치 그 소리들이 새로운 리듬을 타기 시작한 듯했다. 나는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이 더 이상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속에서 전해지는 무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 우리 사이를 천천히 휘감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그 속에는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나는 무언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 나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부드럽고 느리게 내게로 다가왔다. 마치 긴 밤의 끝자락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여명의 빛처럼.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며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속에서 무언가 고요한 안식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미소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말없이 마주한 채, 그 짧은 순간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오갔다. 그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둘만 남은 것처럼 고립된 듯했다.
주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웃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바텐더에게 소리치며 주문을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 공간을 가득 채웠지만, 그 순간 나에게 들리는 것은 오로지 그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깊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고, 그 공기의 흐름조차도 내게 전달되었다. 이따금씩 바깥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문틈 사이로 스며들어 피부에 닿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내 안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덥혔다. 그의 존재가 내게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우리 앞에 놓인 술잔 속의 액체는 은은하게 반짝였다. 조명이 잔 속에서 춤을 추며 빛을 반사했다. 그 작은 빛의 흐름조차도 우리의 감정을 따라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시 천천히 잔을 들어올리자, 유리잔은 그의 손끝에서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 잔이 마치 우리의 감정처럼 불안정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무언가 말로 다할 수 없는 끌림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우리가 서로를 만났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는 운명처럼 이곳에 이끌려 온 것이다. 그는 나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고, 나 역시 그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이 순간에, 이 공간에서 만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우리는 서로를 찾았고,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와 나는 이미 더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의 눈빛, 그의 숨결,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미 나에게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신기하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바깥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처럼 내게 스며들었다. 그 차분한 목소리는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나의 불안과 고독을 덮어주었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의 시선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우리가 어떤 길을 함께 걷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 길이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