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버텨요. 파도가 어떻게 치던 간에.
유튜버 중 [승우아빠] 채널을 운영하던 목진화가 한창 '경력있는 신입'이란 컨셉으로 영상콘텐츠를 뽑았다. 자기와 같이 주방일을 했었던 후배들의 레스토랑으로 찾아가, 일일 막내로 일하는 게 주된 구성이었다. 목진화의 후배들은 신이 났다. 선배지만 자기 업장에서만큼은 막내이기에 그동안 당했던 걸 돌려주겠다는 각오로 굴려댔다. "빨리빨리 안움직여?", "야, 탄다 탄다!", "할 수 있잖아?"를 후배들이 외치고 있었고, 목진화는 그야말로 호되게 당하면서 일을 했다. 전직장에서는 내 상사인데 현직장에선 내 후임, 군대에선 내 선임인데 사회에선 내 후배. 주객과 갑을이 전도되는 모양은 도파민을 뽑기에 좋은 소재였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콘텐츠를 즐겨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주방에서 일해봤던 나나 몇몇 시청자들은 그 와중에 목진화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보면서 혀를 내둘러야 했다. 처음에는 집기류가 어디있는지도 몰라서 우왕좌왕 하는 그였지만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재료를 꺼내고, 팬을 올리고, 플레이팅을 하는 동선에 체계가 잡혀지는게 보였거든. 웬만한 경력이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포텐셜이란 걸 알기 때문에 영상의 후반으로 갈 때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지금은 목진화 콘텐츠를 잘 보지 않지만, 남의 주방에서 막내로 구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쉴 때가 있다.
2024년 11월, 정확히 10달만에 나는 재취업을 했다. 금융권 CS센터에서 일하는 아웃소싱 직원이고, 전월세보증금대출에 대한 서류심사역을 맡았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고객들이 제출한 서류와 정보를 확인하면서 은행 규정상 보증금 대출 심사 진행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확인한다. 쉽지 않은 업무라도 자신이 없진 않았다. 다른 은행이긴 했지만 해봤으니까. 센터장이 내 전직장 상사였기에 갑자기 생긴 TO에 빠르게 들어갔다. 1년을 가까이 쉬었다가 다시 들어온 직장이어서 대우는 신입과 동일했다.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경력있는 신입이었다.
2년 정도를 쉬긴 했지만 기존에 1년 반 정도 해봤던 업무였고, 잘난 척은 아니지만(맞나?) 4개월만에 부팀장 자리까지 올라가봤던 이력이 있었기에 비장한 각오를 했다. 들어가서 빠르게 적응한다. 빠르게 직장 패턴 자체에 익숙해지고 업무에 익숙해지고 나의 루틴을 안정화 시켜야지. 명동에 출근한뒤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비장한 각오를 한 것에 대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생각했다간 아마 중도에 퇴사하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여신CS부서는 지극한 편안함과 지독한 불안함이 공존한다. 은행에 대출을 받고자 하는 고객들은 그 금액이 한두푼이 아니고 적게는 몇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을 넘어가기 때문에 모든 콜센터를 통틀어서 성향이 좋다.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준비해주고, 뭐에 협조해달라고 하면 해준다. 말도 잘 듣는다. 듣지 않았다가 대출을 못받게 되는건 고객이지 내가 아니니까. 다만 내가 무언가를 잘못 안내하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은 역전된다. '오안내'로 인해 고객이 금전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로지 내가 지게 된다. 얼마 전 신청할 수 있는 대출유형이 없는 고객에게 직원 하나가 서류 준비해주면 가능하다는 식으로 안내했다가 계약금을 날릴 처지가 되자 부서 매니저까지 나와서 고객에게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센터의 일은 아니었지만 당장에 내 일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업무 메뉴얼을 보면서 골머리를 싸매는 일이 많았다.
사과를 알고 있는 아이에게 배를 알려주는 것은 쉽다. 색깔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그냥 같은 '과일'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갈 뿐 엄연히 태생이 다르다보니 그냥 별개의 존재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다만 사과를 알고 있는 아이에게 아오리사과와 후지 사과, 홍로 사과를 구별하라 그러면 아이는 울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어지간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지 않았다면 구별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일하고 있는 은행이 딱 이 모양새였다. 기존에 일했던 은행과 하는 업무는 동일했지만, 동일했음에도 규정이 미묘하게 달랐다. 진행되는 전체적인 포맷은 똑같은데 여기선 되는 서류가 저기선 안 됐고, 저기선 인정 못해주는게 여기선 인정이 되는 식이였다. 상담원은 고객이 무사히 대출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정확한 안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고객이 원하는 홍로는 안팔고 홍옥을 팔아버렸다? 이건 대출사고다.
업무 전에 잠깐 동석교육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내게 전산을 가르쳐야 하는 직원이 말했다. "이미 다른데서 일하고 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럼 뭐 잘 아시겠죠." 아뇨 하나도 모르는데요. 아니 전 신입이라니까요? 그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상 센터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 적어도 2할 정도가 내가 예전 직장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그땐 내가 부팀장이었고, 그들이 후임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뭔가를 물어보고 있으면 대답은 되물음으로 돌아왔다. "과니님 이거 우리 예전에도 했었잖아~" 아니 기억 안난다니까요! "그거 우리 저거 했던거랑 똑같이 하면 돼." 그게 뭔질 모르겠는데요!
내 잘못은 아니지만 뿔딱지가 단단히 난 고객님에 대해 보고하자 "전화해서 잘 달래봐~ 과니님 말 잘하잖아~" 아니 그거 옛날이라니까요! "과니님 이렇게 단순한 데에서 실수 하면 안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과니님 그래도 할만하죠?" 죽...여...줘...
기존과 어디에서 차이가 발생하는지 세부사항들을 보는데만 한나절인데 고객은 물밀듯이 몰려들어왔다. 목진화가 떠올랐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후임들 밑으로 들어가서 일할 생각을 한 겁니까 휴먼. 생각은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그래, 일일 알바로 일하고 콘텐츠 뽑은 뒤 돈 벌 텐데 누가 누굴 걱정하냐. 내 할 일이나 해야지. 하지만 경력있는 신입이 겪는 액기스중 액기스만 뽑았구나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업계에서 경력있는 신입만큼 슬픈 소리는 없지 않을까. 경력자면 경력자, 신입이면 신입으로 들어가는게 아니고 보다 나아질 거라는 나의 현실에 대한 희망을 품고 나서 허리를 숙인채 들어가는 구멍과 비슷한 느낌이니까. 잘 해도 대우는 신입으로 받는 경력자. 잘 못하면 경력이 무색하다는 소리를 듣기 좋은 신입. 어중간한 경계선에서 줄을 타는 광대는 유튜브에서나 웃기지, 공연을 하고 있는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속으로 땀을 흘리고 있을까. 얼마 전 나는 센터장에게 불려가서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다. '과니님. 솔직히 고객 응대에 있어서는 흠잡을데가 아무것도 없어요. 고객사 자체평가에서도 만점을 받을 정도니까. 그런데 전산상 단순한 실수 때문에 반려가 이렇게 계속 생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힘내고 조금만 더 신경써줘요." 그 다음날 나는 신경을 과하게 쓰느라 더 잦은 실수를 해버렸고, 스스로 성질을 못이겨서는 화장실로 가서 찔끔찔끔 울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게 거는 기대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믿음이었고, 그 믿음에 되려 초를 친 것만 같아서. 이러다가 진짜 큰 실수를 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한다. 이 불안함이 나만 느끼는 불안함은 아니겠지. 오늘도 어딘가에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경력있는 신입이 있겠지. 본인의 처지가 본인이 봐도 웃겨서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면서도, 사이에 낀 것까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겠지. 부팀장님은 내게 '설 연휴가 끝나면 달라져서 와줄거라고 믿어요'라고 말했고, 나는 오기가 생겨서는 '아뇨 이번 주 내로 바뀔 겁니다'라고 말했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 딱 한 명의 고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대부분의 고객을 별도의 반려 없이 심사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못하면 하게 될 때까지 버티고 서 있겠다는 각오로. 불안함을 덮고서 뒤척일지도 모르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Rick Rigsby가 칼 매리타임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서,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해줬던 말을 대신하여 전한다.
SON. JUST STAND. YOU KEEP STANDING.
No matter how rough the sea, you keep standing.
아들아. 그냥 서라. 계속 서 있거라.
파도가 얼마나 거칠든지 간에, 그저 서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