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이제 그만 때울 때가 와브렀어
93년생인 나는 공릉동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00년도였고, 학교에서 나눠줬는지 우리가 문구점에서 샀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알림장'이라는 걸 가방에 넣고 다녔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종례를 할 때즈음 선생님은 받아적으라며 다음날 준비물이라던가 가정통신문 동의 등을 말씀해주셨고, 빨리 쓴 사람부터 집에 갈 수 있었기에 나는 정말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말을 받아적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첫 번째는 글씨도 제대로 잘 쓸 줄 모르는 1학년 애가 빨리 쓰면 그게 글씨인지 자다 일어난 짐승의 머리털인지 분간하기 힘들단거다. 집으로 돌아간 내게 엄마가 알림장을 보더니 이게 무슨내용이냐고 물었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나도 내가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같은반 친구였던 여자애가 우리 엄마에게 "명관이 글씨는 빨랫줄에 널렸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탄성이 나올 정도로 기가막힌 표현력이다) 이 와중에 문창과를 졸업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CS센터에서도 나는 초등학교때와 좀 비슷한 성향을 가진다. 고객이 들어오면 빠르게 자료를 입력하고 등기부등본을 조회하고, 필요한 서류가 뭐뭐인지 파악해서 전화할 때까지의 텀이 짧은 편이다. 들어온 고객 빨리빨리 쳐내면 좋은거 아닌가. 급하게 심사를 진행해야 하는 고객들이 있으면 내게 처리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구멍이 날 때가 있단 거다. 자음이 하나 틀리고, 숫자를 하나 잘못 입력한 식이다. 혹은 고객에게 어떤 사항을 미리 얘기해놔야지 해놓고선 그대로 까먹어버려서 나중에야 다시 전화를 하기도 한다. 고객 만족도는 높다. 고객사 평가에서도 100점을 받을 때가 있으니까. 말이 빠른 편이지만 딕션이 정확한 편이고 고객과 통화를 시작하고 빠른 시간 내에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한다. 처리율도 높은 편이다. 고객의 서류를 내가 몇날며칠을 가지고 있는건 답답해서 못하니까. 그런데 정확도가 떨어지다보니 팀장님은 항상 내게 제발 반려만 줄여달라고 사정사정을 한다. 본래 성격 같으면 눈 댕그랗게 뜨고 '하지만 빨랐죠?' 라고 하겠는데, 내 반려율이 센터의 실적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단 걸 알다보니 '뎨숑합니다..'라고 한 뒤 쭈글이가 된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꼼꼼하지 못해서 몸으로 때운 적이 많았다. 주방에서 일할 때는 영업 마감을 할 때 20가지를 해야 한다면 열아홉가지를 완료한 뒤 한가지 씩은 빼먹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다 말고 퍼뜩 기억나서 다시 가게로 돌아간 적이 잦았다. 친구와 같이 스타크래프트 1:1 대전을 할 때는 내 게임 플레이를 지켜보던 다른 친구가 "와 넌 진짜 뭐가 빠르다. 근데 아무것도 없어!" 라고 말해서 수치사 할 뻔했다. 헬스장에선 무료 PT를 해주던 선생님이 "회원님은 정말 운동능력이 좋으시네요! 그런데 운동지식이 아무것도 없으세요!"라고 해서 힘껏 숨 참으며 주고 있던 복압이 풀릴 뻔했다. 아닌게 아니라 진짜 그런 식이였다. 문이 안 열리면? 문을 부숴야지! 야 언제 열쇠찾고 있냐 그 조꼬만한걸! 중학교때 내 좌우명은 '몸으로 때우자'였다. 고등학교때 MBTI를 처음으로 검사해봤는데 아직도 결과지에 그 문장만큼은 기억난다. '잘 먹고 잘 자고 생각이 단순합니다.' 천식이 있는 내 몸은 다행히도 폐 용량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컸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드는거다. 그냥 몸 자체가 이가 안되면 잇몸으로 때우겠다는 것에 익숙해져있나. 문제를 해결할 생각 자체를 잘 안하는건가?
작년 초즈음이었나, 볼링장에서 내가 스킬이 없어 15파운드짜리 공을 직구로 굴려버리자 선배가 보고선 말했다. "봤니? 저게 바로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놈이야. 우리같이 9파운드로 아무리 스핀 현란하게 넣어봤자에요."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또 하나의 8파운드 후배는 짜증난다고 말했고, 나는 웃어버렸다. 온 몸에 염증반응이 있고, 아토피에, 간염 보균자에, 천식에, 알러지 거의 대부분을 다 가지고 있다보니 나는 내 몸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작년 10월즈음에 통화한 내 동창은 "야 내가 니 몸뚱아리였으면 지구정복도 했어!"라고 말했다. 슬슬 인정해야 했다. 나는 피지컬로 때우는 놈이다.
허약했던 유년기 시절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친구와 할머니가 걱정하는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자각하지 못했던 것 뿐이지 살아남은 것은 피지컬 덕분일 거다. 엄마는 체구가 굉장히 작고 마른 편이었지만 외가쪽은 하나같이 체력이 발군인 사람들이었고 다행히 나는 엄마 피를 잘 물려받은 듯하다. 다만 여기서도 아주 크나큰 문제가 하나 있는데, 분명 그 체력으로 항상 쉼없이 움직이면서도 뭐 하나 빼먹은건 우리 엄마도 똑같단 거다. 알고보니 유전이었던 거지. 엄마도 A를 하다가 B를 하고, B를 하다가 "가만있어봐?" 하며 C를 하더니 한참 있다가 "어머 내 정신좀 봐!" 하면서 A를 다시 마무리하니까. 엄마 미안! 아들이 브런치 작가 당선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기서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
내 몸뚱이를 주면 지구정복을 하겠다던 동창은 "야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니 무슨소리야.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는거야!"라는 괴랄한 명언을 남겼다. 피지컬이 받쳐지는 나는 몸이 되니까 머리를 쓰려는 생각을 잘 안해왔던거라고. 빵 터졌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를 했다. 자기는 체질 자체가 근육이 생기질 못하는 저질이니 머리라도 좋아야 하는거 아니냐 그러는데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곤 "네 피지컬로 머리까지 좋게 만들어봐. 장난 아닐걸? 힘들기야 하겠지만 원래 안하던거 쓰려 그러면 괴로운거야 당연한거 아니야?"라는 소리를 하는데, 아서라. 말이 쉽지. 가족 내력은 무시하는게 아니란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내 기준 머리 아픈 일들을 하는 중이다. 다이어리 쓰고, 플랜 짜고, 업무도 한 템포 늦춰가면서 메뉴얼 한번씩 더 보면서 진행하고.. 사람의 성장은 20대때 끝나고 나머지부터는 노화라는데, 30대인 내가 몸으로 때우겠다고 또 있는 힘껏 움직였다간 어디 하나가 작살나는 걸 걱정해야 한다. 아무리 평균 이상의 피지컬이라고 해도 건설 현장일을 매일같이 나올 정도로 좋다거나 운동 했었던 친구들을 따라가는건 아니니까.
웃긴건 생각을 짧게 하고 행동으로 바꾸는데는 그렇게 빠르면서 행동을 멈추고 생각부터 하는건 피지컬이 얼마나 딸리는지. 그래도 저 웃기지도 않은 궤변에 유쾌해진 뒤로는 딱히 내 이런 점이 싫진 않았다.
소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빠르진 못해도 육중하게 쿵쿵 거리며 걸어가봐야지.